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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벌새' 김보라 감독 "야만의 시대 이겨낸 생존자 그려내고 싶었다"①

전 세계를 사로잡은 열 네살 소녀의 서바이벌 성장 스토리는 고달픈 뉴욕 유학생활의 잠자리 꿈에서 시작됐다.

장편 데뷔작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 27관왕에 오른 ‘벌새’의 김보라(38) 감독을 만났다. 품 안에서 세계로 날려보낸 그의 작은 ‘벌새’는 유수의 영화제 25관왕이라는 열매를 수확하며 몸집을 키우고 울음소리를 높였다. 국내에서도 지난 29일 개봉해 적은 상영관 수에도 이틀 만에 1만 관객을 모았다. 자신의 삶도 언젠가 빛이 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불온한 소녀의 내면세계와 그 시대의 자화상을 놀랍도록 선연하게 직조해낸 감독과 마주했다.

- 꿈에서 출발한 건가?

▶ 유학 시절(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 중학교에 다시 다니는 꿈을 꿨다. 조각조각의 기억과 감정을 앞서 단편으로 만들었고, 유년시절의 모든 걸 집대성해서 ‘벌새’를 만들게 됐다. 이민자들의 경우 뿌리가 뽑혔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곤 하는데 나 역시 유학 갔을 때 새로운 나라인데다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도 힘들어서 초반 1년엔 계속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중학생 시절에도 뿌리가 뽑히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꾸게 된 듯하다. 이유를 찾기 위해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 기록을 모아서 트리트먼트로 만들기까지 몇 년 걸렸다. 시나리오 초고가 나온 뒤 ‘나’를 빼고 은희라는 보편적 아이를 통해 공동의 서사를 구축하고, 원형적 인간의 감정을 영화 안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 같다.

 

- 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영화의 배경도 1994년이다. 왜 90년대였나.

▶ 90년대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시기였다. 교육도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으로 이뤄졌다. 일상적인 성희롱과 성추행, 두발규제와 같은 일들이 일상에서 비일비재했다. 우리는 그 룰에 따라야만 해서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극중 교사가 ‘서울대 가자!’ 외치는 신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승자 독식주의 시스템 안에 갇힌 시대였다. 기형적인 발전이 인간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집약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성수대교 붕괴 아닐까. ‘벌새’에 90년대 한국사회를 담아내고 싶었다.

-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 경험이 주인공 은희에게 많이 투영된 것 같다. 얼마나 닮은 건가.

▶ 은희는 서민아파트에 거주했고, 난 당시 대치동에 살았다. 다른 거주공간이지만 모든 것이 학업성적, 성별로 분류되는 걸 온몸으로 느꼈던 건 동일하다. 대치동 아파트단지에 살았어도 몇 동에 사는지, 아빠 직업과 차종,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에 따라 ‘계급’이 나눠졌다. 어른들의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아이들이 서로를 분류하는 부조리한 현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인간됨이 무엇인지에 고민이 많았다.

 

- 은희는 학교에선 성적으로, 집에선 남아선호사상으로 차별당하고 육체적 폭력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끔찍한 일들인데 영화는 매우 정적이고 관조적이다. 심지어 긍정의 무드가 넘실댄다.

▶ 다른 영화에선 극단적 폭력을 다루는데 이 영화에선 정상적이고 평범한 가족임에도 끔찍한 폭력성과 야만성을 드러낸다. 학교도 마찬가지고. 그런 균열을 담아내고 싶었다. 대신 주인공을 가학적으로 몰고 가 ‘피해자성’을 강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일상의 억압을 말하면서도 주인공을 피해자화 하지 않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다. 관객들이 ‘생존자’ ‘희망에 찬 엔딩’으로 봐주는 게 기쁘고 고맙다.

 

- 후반부에 등장하는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세월호 사건’을 다룬 영화가 하나둘씩 등장하듯 ‘성수대교’ 메타포 영화인가란 의견도 나올 법하다.

▶ 민감한 소재라 고민이 많았다. 우리 안에 있던 역사적·정치적 사건, 재난이 일상과 괴리돼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성수대교를 언제 등장시킬까 설왕설래했다. 3막쯤 등장하는 게 맞을 듯했다. 관계 안에서 단절과 붕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은희의 가족, 학교 안에서의 작은 균열들이 쌓였다가 압력을 견딜 수 없을 때쯤 폭발하고 붕괴하듯이. 1~2막은 작은 사건들이 쌓여가는 단계라 속도를 천천히 가져가고, ‘성수대교 붕괴’ 자막이 뜨고 나서는 폭주 기관차처럼 빠른 속도감으로 몰고 갔다.

- 여전히 상당수 독립영화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어렵고 무거운 톤으로 관객과 만나는데 ‘벌새’의 경우 밝고 재미나는 쿨톤이라 이채로웠다.

▶ 대중이 ‘벌새’를 쉽고 재밌게 받아들여 주시길 바랐다. 유머가 중요해서 곳곳에 장치를 심어놔서 많이 웃어주시길 원했다. 앞으로도 감독인 나만 이해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 대학시절 신경림 선생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초등학교 때 배웠던 단어들로 복잡한 의미를 창출하는 시가 좋은 시다“란 말씀이 감동적이었다. 쉬운 것들이 모여 굉장히 복잡한 결들이 느껴지는 영화이기를 바란다. 작가로서 계속 고민해나갈 숙제다.

 

- ‘벌새’는 그 어떤 작품보다 여주인공의 롤이 중요한 작품이다. 박지후란 신인을 캐스팅해 놀라운 성과를 일궈냈다.

▶ 전에 단편영화에서 못된 언니로 나왔고 상업영화에선 단역으로 출연했던 친구다. 대구애 사는데 어머니와 함께 오디션을 보러왔다. 첫 리딩 때부터 시나리오 행간의 의미, 서브 텍스트를 잘 이해하고 직관적으로 연기하는 점이 무척 좋았다. 최대한 자신답게, 어떤 걸 하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연기해주길 원했다. 신마다 감정을 느끼고 목표를 가지고 연기하기를 바랐는데 리얼리즘적 연기를 힘을 빼서 잘 해냈다. 특히 대사 없이 물끄러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아주 좋았다. 영지(김새벽) 선생님과 소통 자체였던 대화를 나눈 뒤 밤늦게 혼자 걸어오는 장면에서 박참 충만함, 미래에 대한 불안함, 아름다움의 끝에 대한 슬픔과 아쉬움 등 복잡미묘한 심리가 눈빛과 표정에 다 나왔다.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영화 '벌새'의 배우 김새벽(왼쪽)과 박지후

- 분량이 많진 않았으나 은희의 학원 한문선생님으로 출연한 김새벽 배우도 인상적이었다.

▶ 처음부터 김새벽이 정답처럼 떠올랐다. 서로 동의했던 게 ‘이상적이고 착한 영지의 모습이 아니라 담담하고 따뜻하게 가자’였다. 최근 말레이시아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는데 영화제 측이 ”분량이 많지 않은데 나오지 않는 구간에서도 그 배우를 그리워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부재를 통한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배우, 최고의 상찬이다. 극중 영지 선생님은 누군가에게 쉽사리 조언하지 않고, 함부로 남의 삶에 침범하지 않는다. 친밀한 관계가 맺어졌을 때 정말 조심스럽게 시도한다. 여태까지 보지 못한 서늘한 결기와 열기. 조용한 분노와 소용돌이. 비장한 느낌이 느껴지는 얼굴이기를 바랬는데 그녀의 얼굴이 그 자체였다.

사진=한제훈(라운드테이블)

에디터 용원중  goolis@sli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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