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데뷔작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 27관왕에 오른 ‘벌새’의 김보라(38) 감독을 만났다. 품 안에서 세계로 날려보낸 그의 작은 ‘벌새’는 유수의 영화제 25관왕이라는 열매를 수확하며 몸집을 키우고 울음소리를 높였다. 국내에서도 지난 29일 개봉해 적은 상영관 수에도 이틀 만에 1만 관객을 모았다. 자신의 삶도 언젠가 빛이 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불온한 소녀의 내면세계와 그 시대의 자화상을 놀랍도록 선연하게 직조해낸 감독과 마주했다.

동국대 영화영상학과를 나온 그는 대학 재학시절과 졸업 직후 단편영화 ‘계속되는 이상한 여행’(2002), ‘빨간 구두 아가씨’(2003), ‘귀걸이’(2004), ‘철수야 철수야 뭐하니?’(2005)를 연출했다. 다른 감독들처럼 충무로에서 터를 잡고, 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하고, 경력과 인맥을 넓히며 ‘입봉’의 기회를 파고드는 트랙을 선택하지 않았다. 미국 명문인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 영화과로 유학을 떠났다.

”현장에 나아가는 게 염려됐어요. 바로 간 언니들 얘기에 따르면 현장은 남성중심적이었고, 남자인 동기와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 상황이었죠. 더 중요한 건 연출 공부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됴. 다른 지형에서 공부해보고 싶은 열망이 솟구쳐 유학을 결정했어요.“

뉴욕에 연고지가 있거나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학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고달팠다. 1학년 1학기 때 월화수목 강의와 과제에 허덕이다 보면 금요일 오전 수업을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다. 한 달 정도 그 수업을 결강하자 교수의 호출이 왔다.

”이유를 물으시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워낙 빡빡한 커리큘럼 탓에 너무 힘들어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차분히 듣고만 계시다가 ‘너한테 내일 당장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말하진 않을 거다. 그러긴 힘드니까. 하지만 다음 학기, 1년 후, 졸업할 때 쯤엔 다를 거다“란 말씀을 해주시는데 너무나 위로가 됐어요. 굉장히 현실적인 조언인데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져서 다음 주부터 열심히 수업 듣고 결국은 패스했어요.”

그렇게 만난 인생의 스승 댄 클라인만 교수는 ’벌새‘의 모태가 된 졸업작품 ’리코더 시험‘(2011) 편집을 여러모로 도와줬다. “너가 중간에 그만두지 않아서 얼마나 기쁘고 다행인지 모른다”는 격려의 말을 해줬다. ’벌새‘ 속 주인공인 여중생 은희(박지후)와 한문선생님 영지(김새벽)의 관계를 만들어내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게 인생에 얼마나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지, 제가 누렸던 아름다운 소통을 영지와 은희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어요. 교수님께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프리미어 전부터 ’너의 이야기오 목소리는 세계에 남겨져야 한다‘는 덕담을 해주셨어요. 영화제에서 수상할 때마다 기사를 학교 홈피와 SNS에 퍼다 나르세요.(웃음) 마치 친할아버지처럼 저의 성장을 지지해 주세요.”

지난 5월 뉴욕에서 열린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벌새‘가 국제경쟁부문 대상, 여우주연상, 촬영상 3관왕을 차지했을 때는 이례적으로 10회나 상영이 이뤄졌고, 모교에서 후배들과 1시간 넘게 Q&A까지 진행했다.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클라인만 교수는 애제자 김보라 감독에게 ’벌새‘가 원형적인 이야기를 담아서 좋다는 말과 더불어 작업자로서 그의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 역시 그의 제자였는데 “내가 가르쳤던 3대 학생 중 하나가 김보라”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단다.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는 게 주문처럼 내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교수님처럼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선생님들한테 배운 것,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면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인간이 원하는 것은 보편적이고 단순하구나. 제대로 사랑받고 사랑하는 게 욕구구나를 깨달으면서 저의 영화세계도 바뀌었어요. 저 자신에 침잠했던 과거와 달리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서사로 원형적인 세계를 건드려나가는 걸로요. 졸업 후 독서와 모임에서 대화를 많이 나누며 여성의 삶에 대해 성찰하게 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고요. 미국 유학 시절은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확장을 경험한 소중한 순간이었죠.”

김보라 감독은 여성의 눈으로 계속 영화를 만들 예정이다. ’벌새‘의 은희-영지처럼 자매애를 비롯해 여성의 삶을 대상화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그리고 싶다. 더불어 여성의 눈으로 보는 역사. 대서사. 전쟁영화, SF영화 등 여성감독이 흔히 시도하지 않는 작품을 개척해보고픈 욕망에 달뜬다.

 

에필로그- 전 세계 영화제 27곳에서 ’러브콜‘을 받았고 의미 있는 수상을 이어가는 중이다. 영화제 스토리가 궁금하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수상 모습/사진=김보라 감독 제공

“각각의 나라별로 의미가 있었어요. 지난 2월 제69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부문 대상을 탔을 때가 제일 신기했어요. 프리미어 때 관행상 프로그램 디렉터가 레드카펫에 참석하는데 당일 취소를 해서 많이 실망했거든요. 속으로 우리 영화를 별로 안좋아하나? 주목받지 못하나? 했죠. 수상은 기대도 안했어요. 전날까지도 영화제 측에서 시상식에 참석하라는 연락도 없었고요. 그래서 배우들과 베를린 시내 관광을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라고 권유해서 참석했죠.”

문제의(?) 디렉터는 그날 정말 몸이 아파서 오지 못했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해외 첫 상영이었음에도 심사위원진과 관객들 반응이 뜨거웠다. 트라이베카 국제영화제의 경우 10년 전 유학을 했던 뉴욕에서 열리는 영화제라 친숙하면서도 금의환향한 느낌에 행복했다. 자신을 가르쳤던 대학원 교수들이 총출동했고, 수상이 호명되자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사진=한제훈(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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