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영화인들의 축제. 지난 26일 미국 LA돌비극장에서 개최해 성황리에 막을 내린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 어떤 때보다도 정치적인 해를 맞이했다. 전 세계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반(反) 이민 행정명령에 대한 저항으로 들끓자,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할리우드도 '안티 트럼프'를 외치며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불신을 가감없이 표했다.

 

지미 키멜 / 아카데미 시상식 홈페이지

우선 89회 아카데미 호스트로 나선 방송인 지미 키멜은 영화와 정치적인 이슈를 적절하게 섞은 유쾌한 입담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오프닝을 달궜다. 키멜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굳이 제 생각을 말하지 않아도 현재 국가가 분열돼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제 한데 모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소신껏 말했다.

키멜은 직접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언급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며 말문을 연 그는 "지난 해에는 오스카상에 인종차별적인 얘기가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 이제는 사라졌다. 이게 다 트럼프 대통령 덕분이다. 정말 놀라운 일들이 많았다"고 너스레를 떨어 박수를 받았으며, 이어 "백인들이 재즈를 구했고(라라랜드) 나사를 구한 것은 흑인이 됐다(히든 피겨스)"라고 덧붙였다.

 

메릴 스트립 / 아카데미 시상식 캡쳐

또한 키멜은 지난 1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반이민 정책을 비판했다가 트럼프에게서 '과대평가 된 배우'라며 비아냥을 받은 배우 메릴 스트립을 향해 "오늘 입은 드레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트럼프가 만든 건가? 아마 트럼프 대통령은 내일 트위터에 글을 올릴 것"이라며 위트 있는 멘트를 던졌다. 트럼프 대통령과 이방카 트럼프의 의류 브랜드 사재기 논란을 동시에 저격한 키멜의 멘트는 장내에 웃음을 퍼트리기 충분했다.

 

한편 이날 시상식장에선 옷에 '블루 리본'을 단 수상 후보들이 잇따라 등장해 시선을 모았다. 블루 리본은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상징이다. 반이민 행정명령에 항의해 소송을 제기하며 법정투쟁까지 불사한 시민단체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을 지지하는 뜻을 나타낸다.
 

케이시 애플렉(위), 루스 네가(아래) / ABC 방송화면 캡쳐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시 애플렉과 '러빙'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루스 네가는 파란 리본을 달아 레드카펫을 거닐 때부터 모두의 이목을 모았다. 특히 네가는 "그들(시민단체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은 시민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 난 그들을 완전히 지지하고 모두가 그래야 한다. 그들은 일종의 감시자로 우리 사회에 매우 중요하다. 어느 때보다도 지금 그들이 필요하다"며 소신껏 발언을 하기도 했다.

 

베리 젠킨스 감독과 '문라이트' 제작진들 / 아카데미 시상식 홈페이지

영화 '문라이트'를 연출해 작품상을 수상한 배리 젠킨스 감독 역시 파란 리본을 달 계획이었으나, 레드카펫 인터뷰에서 "이 리본을 잃어버렸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이후 작품상 수상 직후 소감을 발표할 때엔 파란 리본을 단 채 등장했다.

 

엠마 스톤 / 베니티 페어

이 외에도 애니메이션 ‘모아나’OST로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린 마누엘 미란다와 모델 칼리 클로스까지 많은 스타들이 가슴에 블루 리본을 달고 아카데미 시상식을 찾았다. 영화 '라라랜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엠마 스톤도 베니티페어와 함께 한 트로피 화보를 통해 뒤늦게 블루 리본 캠페인에 동참했다.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 / 아카데미 시상식 홈페이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이란 영화 '세일즈맨'의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아카데미에 전해온 수상소감 역시 화제를 모았다. '시민과 나데르의 별거'에 이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2번째 수상한 파르하디 감독은 이전에 무슬림 국가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 이민법 행정명령에 반발해 아카데미 불참을 선언한 바 있다.

파르하디 감독은 "2번째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해 영광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우리 국민들에 대한 실례라 생각해 불참했다. 미국 이민국의 결정에 대한 저희의 의견을 표현하는 기회로 삼았다"고 생각을 밝혔다. 

 

아쉬가르 파르하디 作 '세일즈맨' 포스터

이어 "지금 전세계를 우리 편과 적으로 나누는 행동은 전쟁을 의미하는 행동이나 다름없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동안 인권이 희생돼 왔기에 더욱 의견을 표명해야 했다고 생각했다"며 "우리들은 우리와 또 다른 사람들과 어느 때보다 공감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수상소감을 마무리했다.  

분장상을 수상한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케이트 맥키너 또한 "나는 이탈리아 이민자다. 모든 이민자들에게 이 상을 바치겠다"고 말하며 이민자들에게 위로를 전했으며, 단편 애니메이션상 시상자로 나선 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역시 "나는 멕시코인이다. 남미인으로서 그리고 이민자로서 인간으로서 어떤 것이든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도널드 트럼프, 지미 키멜 / 지미 키멜 쇼

이처럼 하나된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한 당사자의 반응은 어땠을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미 키멜의 오프닝 멘트, 블루 리본 캠페인,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수상소감, 미국 이민자들의 소신 발언 등 정치적인 이벤트로 풍성했던 아카데미 시상식에 대해 여느때처럼 비아냥거리는 멘트로 일관했다.

트럼프는 27일 현지 매체 브레이트바트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정치에 너무 집중해 결국 (시상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하며 작품상이 '문라이트'가 아닌 '라라랜드'로 잘못 발표된 소동을 저격했다. 트럼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좀 슬펐다. 오스카의 매력을 잃었다"며 "나도 오스카에 가봤지만 뭔가 특별한 게 없었고 그런 식으로 끝낸 것은 슬펐다"고 뒤끝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올해 제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백인들의 잔치'라고 비판 받으며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sSoWhite)'라는 해시태그로 유구한 역사에 먹칠을 했던 지난해에 비해 진보한 공정성과 다양성으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작품상은 흑인 소년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문라이트'가 수상했으며, 조연으로 활약한 흑인 배우와 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와 또 다른 작품 '펜스'의 비올라데이비스가 각각 남우·여우조연상을 수상해 이목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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