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한 여배우가 들려주는 변주곡이 흥미롭다. 이청아(33)가 드라마 ‘운빨 로맨스’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비즈니스 우먼, 연극 ‘꽃의 비밀’에서 연하의 배달부와 썸을 즐기는 미모의 유부녀 모니카를 능란하게 연주하자마자 심리스릴러 ‘해빙’(3월1일 개봉)에선 비밀을 지닌 간호조무사 미연으로 무대에 섰다. 삼청동 언덕에 자리한 카페에 나타난 그녀가 ‘더 파이브’ 이후 4년 만에 영화 인터뷰에 나섰다며 청아한 미소를 날렸다.

 

 

제1막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의 느낌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나왔어요. 선배님들이 풍성한 연기로 살을 붙여주신 덕일 거예요.  그 안에서 난 내 역할을 다 했는가, 스스로 물어보고 있어요.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다음날 담이 들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처음 접했을 때도 단서를 찾아가는 즐거움이 컸는데, 퍼즐을 맞춰가는 재미가 고스란히 살아나 만족스러워요. 이수연 감독님이 ‘해빙’은 화장실 파이팅 무비라고 했어요. 관람 후 관객들이 논쟁을 벌인다는 의미에서요. 관객이 사유하게끔 만드는 영화이지 않을까 싶어요. ‘인셉션’ ‘메멘토’가 연상되지 않을까 싶고요. 저라면 3번까지는 흥미롭게 반복 관람할 수 있을 듯해요.

 

제2막

신도시 개인병원의 간호조무사 미연을 맡기로 한 뒤 기존 제 이미지와 달랐으면 했어요. 청순한 캔디 캐릭터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가 그런 이미지를 벗고 싶어서 영화 ‘놈놈놈’의 액션에 도전했고,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에선 황정민 선배님의 푼수 여동생을 연기했었죠. 이 캐릭터들이 빛의 범주였다면, ‘해빙’을 시작으로 어둠의 끝에 다가서는 캐릭터들을 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보기엔 이질적이었겠으나 ‘해빙’을 했기 때문에 ‘뱀파이어 탐정’의 요나를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 영화가 각별해요. 대중에게 익숙해진 이청아 스타일 배역에서 벗어나려 시도한 작품이니까.

 

 

제3막

시나리오 초고에 미연과 관련해 적어놨던 메모는 “이대로 보일 것!”이었어요. 최대한 연기하는 느낌을 내지 말자란 의미에서요. 영화가 끝났을 때 “이청아가 잘했네”가 아니라 “딱 그런 신인을 데려와 썼네”란 평을 듣고 싶었어요. 제가 항상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반면 미연은 꿈과 희망이 없는 인물이에요. 자신이 볼 수 있는 세상이 뻔했기에 명품백을 사는데서 자기 위안을 얻으며 살아가죠. 왜 위로 올라가려고 하질 않을까 고민하다가 미연이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편으론 측은했죠. 낯선 느낌을 내기 위해 헤어, 분장, 의상을 ‘촌스러움+화려함’ 식으로 설정했어요. 체중도 4kg가량 뺐고요. 선한 역만 해왔기에 관객이 스크린 속 저를 믿어버리면 안 된다는 판단에서요.

 

제4막

모든 것을 잃은 뒤 페이 닥터로 부임해온 승훈 역 조진웅 선배님 팬이었어요. ‘끝까지 간다’에서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올 때의 위압감을 잊지 못했거든요. 국내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배우라고 여겼고요. 이번에 선배님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놀랐던 게 몇가지 있어요. 시나리오에서 상상했던 파란색을 선배님은 형광톤 파랑색까지 준비해 오시더라고요. 대본에 있는 10을 20으로, 극적으로 만드시고요. 전 늘 상대를 빛나게 해주는데 치중했고, 내가 반짝이는 걸 경계했어요. 이후 비슷한 구조에서 무난한 롤을 주로 맡다보니 익숙해졌고요. 주연이든 조연이든 더 극적으로, 세게 만드는 법을 연구하면 내 연기가 더 풍성해지겠다란 결론에 이르게 됐어요. 실수를 거친 뒤 화법의 차이를 제대로 느낀 셈이죠.

 

 

제5막

예전엔 작품을 고를 때 상황이나 타이밍을 중시했어요. 저보다도 회사 등의 조언을 받아 결정했고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자 식이었거든요. 하지만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부터 바뀐 것 같아요. 큰일을 겪으면 사람이 달라지나 봐요. 굉장히 용감해졌어요. 마음에 품었던 것들이 생각으로 끝나버리곤 했던 걸 깨닫고 나서부터 재밌겠으면 해야겠고. 힘들 것 같으나 하면 늘 것 같은 작품을 하기 시작했어요. 후회하더라도 해봐야 미련이 남질 않잖아요. 대신 할 때 최선을 다해야겠죠. ‘해빙’ 역시 도전해보고 싶었던 작품이라 선택한 거고요.

 

제6막

아버지(연극배우 이승철)는 제가 배우가 되는 걸 반대하셨어요. 이목구비가 작고, 힘이 부족하고, 목소리도 작다며 (연극)배우를 하기에 좋은 조건이 하나도 없다며 상처를 주셨어요.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 할 때도 반항심에 “연출하겠다”며 강행했죠. 지금은 제 캐릭터에 대한 얘기보다 자세나 큰 그림만 언급해주세요. ‘꽃의 비밀’을 보시고 나선 “선배들 걷는 걸 자세히 봐 볼래. 카메라 앞과는 다른 자연스러움이 있다” 식의 조언이죠.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건 그만큼 절 존중해주시는 거니까 늘 감사하죠.

 

 

제7막

‘늑대의 유혹’(2004) 이후 1년이나 작품을 안했어요. 갑자기 눈떠 보니 스타가 돼있었죠. 누구나 영화 속 그 캐릭터로 봐버리고, 21세인데 고교생으로 인식했어요.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 겪어야하는 부분을 아무 것도 몰랐던 아이였어요. 결국 부모님이 소속사에 부탁해 활동을 쉬고 학교에 다니겠다고 하셨죠. 너무 쉬다가 드라마 ‘해변으로 가요’에 출연했어요. 처음으로 돌아가 단역부터 차근차근 밟아왔던 시간이라 후회하진 않아요. 돌이켜 보면 똑같이 겪어야만 했던 ‘시간’이지 않았을까요. 현재는 연기 폭이 넓어진 것 같아 마음이 아주 편해요. 작년엔 ‘스펙트럼을 넓히자’를 목표로 삼았고, 올해는 ‘한 가지 색깔만 더 갖자’로 정했어요. ‘해빙’으로 관객들이 절 의뭉스럽게 봐주지 않을까 많이 기대돼요.

 

사진 지선미(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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