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가장 아픈 부분에 위로의 손길을 건네며 짙은 울림을 전하는 영화가 있다. 지난 삼일절에 개봉한 ‘눈길’이 바로 그 주인공.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연을 조심스레 조명하면서 관객들의 가슴에 감동 씨앗을 콕 박아 넣는다. 여기에 “일상이 된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조명하고 싶었다는 이나정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이 더해져 영화의 메시지는 더욱 강하게 빛난다.

 

사진=워너비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초봄의 여의도에서 이나정 감독을 마주했다.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띄며 연신 인터뷰가 어색하다는 말을 전했지만 작품을 설명할 때, 그녀의 눈빛과 어투엔 당당한 줏대가 묻어났다.

 

• 2014년에 KBS에서 2부작 드라마로 방송됐던 작품이 이젠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관객을 찾아간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 영화를 해보니 많은 것이 새로웠다. 내 옆에 앉은 관객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TV는 반응을 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는 데 반해, 옆자리에서 많은 분들이 함께 보고 있다는 생각에 좀 따뜻하다고 해야 할까.(웃음) 그런 기분이 들었다. TV는 언제 채널이 돌아갈지 몰라서 한시도 지루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는 2시간 가량은 딱 온전히 집중 되는 거니까, 그 안에서 차분히 얘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장점도 있는 것 같다. 찍으면서 내내 영화인들이 부러웠다.(웃음)

 

• 사실 TV드라마가 영화 스크린으로 넘어오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어떤 계기로 극장 개봉을 하게 됐나?

- 맨 처음부터 드라마가 아닌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TV드라마로 만들면 일본에 팔리지 않을 것 같았다.(웃음) 영화 콘텐츠면 적어도 인권영화제 등에 상영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방송 스태프와 영화 스태프를 함께 구성했고, 시나리오도 영화 호흡으로 작성했다. 조금이나마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시고, 이 문제를 더 많이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시작이었다.

 

•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서 영화를 관람하실 거라고 생각하면 연출이나 스토리적 측면에서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할머님들을 보게 됐다. 나눔의 집도 찾아가고, 수요 집회에도 참석하는 건 물론이고, 실제 기록들도 많이 접했다. 그러고 나니까 더 이 문제에 대해 조심스러워졌다. 자칫 소재주의로 빠지거나, 볼거리로 전락해버린다면 피해자 할머님들께 큰 실례일 것 같았다. 그래서 배우 선정에서도 주의를 기울였다. 섹슈얼한 느낌을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는데, 다행히도 (김)새론이와 (김)향기가 잘해줬다. 두 배우의 힘으로 위안부라는 소재보다도 관계적 측면이 더 부각된 것 같다.

   

사진=싱글리스트 DB

• 김새론, 김향기라는 대한민국 대표 10대 배우 둘이 극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다.

- 이번에 처음 ‘연기도 재능’이라는 생각을 했다.(웃음) 정말 상상이상으로 대단한 배우들이다. 현장에선 디렉션도 거의 없었고, 오히려 둘이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맞춰갔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극 중 종분(김향기)이가 폐허가 된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하고 소리치는 장면이었다. 감정이 아직 많이 끌어올려지지 않은 첫 날에 촬영을 했는데... 정말 그렇게 울지 몰랐다.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는 곳에 서서 느끼는 감정이 훅 와닿았다.

 

• ‘눈길’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이다. 특히 현재의 노인 종분(김영옥)이 어린 영애(김새론)의 환시와 대화를 나누고, 옆집에 소외 받은 소녀 은수(조수향)와 감정을 나누는 부분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 처음 기획 단계부터 구상했던 건 ‘관계’였다. 위안부 문제에 애착이 갔지만, 현재에도 계속 되고 있는 소외된 청소년 문제, 독립유공자 문제 등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실 처음에는 해방 직후에 위안부에서 돌아온 여인, 버림받은 일본 여자,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 셋의 이야기를 생각했었다.(웃음) 아픔을 공유하며 연대하는 이야기였는데, 현재와 연결고리를 찾다보니 ‘눈길’이 탄생했다. 요즘에도 여러 이유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소녀들이 많다. 관객분들이 지금도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꼭 한 번은 알고 갔으면 좋겠다.

 

• 위안부 피해자들을 조명한 여러 콘텐츠들이 늘 아픔에 집중해 왔지만, ‘눈길’에선 ‘연대’라는 위로를 건네며 힐링을 건네는 듯하다.

- 사람들이 죽을 것을 알고도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한다지만, 위안부 소녀들의 사연은 죽음이 당장 눈앞에 와 있는 상황이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 가운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여쭤봤다. 함께 버티고 있던 동료들이 그 이유였다고 한다. 할머님들 말씀을 듣다보면 내 자세가 경건해진다. 위안부 할머님 한 분이 과거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게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당신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우리 그래도 살아보자”며 손을 잡아주셨다고 한다. 꼭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나 거대한 폭력 속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 약자들이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는 연대를 전달하고 싶었다.

  

• 요즘 일본 언론에서 영화 ‘군함도’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눈길’도 그들 입장에선 환영받을 만한 영화는 아니다. 이에 대해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다.

- 피해자 분들에게 사과를 할 때, 일본 정부가 행하고 있는 지금의 방식은 절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사과가 필요하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일본 상영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불어서 이 작품은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비극, 심지어는 지금도 난민 소녀들이 인신매매로 끌려가는 경우도 많다. 폭력에 대한 거대한 저항, 해결책을 바라보는 작품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 이제 다시 본업인 드라마 PD로 되돌아갈 텐데, 또 어떤 계획이 있는지 듣고 싶다.

- 사실 ‘눈길’을 다 찍고서 ‘오 마이 비너스’를 연출했고, ‘오 마이 금비’는 프로듀서로 참여를 했다. 놀고 있지는 않았다. 회사에서 일을 계속 시킨다.(웃음) 본래 일이니까 즐기면서 달리기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맬 계획이다. 5월 달엔 ‘쌈 마이웨이’라는 드라마를 계획하고 있다. 5월 초에 방영되니까, 이것도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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