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섭의 뉴월드가 열렸다. 한국 독립영화계 뉴웨이브 이옥섭 감독이 첫 장편영화 ‘메기’로 평단과 관객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으며 첫 삽을 제대로 떴다.

지난 26일 개봉한 영화는 개봉 3일 만에 1만 관객을 돌파했고 2만 관객을 목전에 뒀다. 이미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연 배우 이주영이 수상한 올해의 배우상, CGV아트하우스상, KBS 독립영화상, 시민평론가상 등 4관왕을 기록했고 오사카아시안필름페스티벌 대상 등으로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

이미 ‘플라이투더스카이’ ‘세마리’ ‘걸스온탑’ ‘연애다큐’ 등의 단편을 통해 독특한 상상력과 위트 있는 연출로 많은 팬을 보유했지만 이번 영화로 하나의 분기점을 맞은 이옥섭 감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메기’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간호사 윤영(이주영)을 중심으로 성원(구교환), 경진(문소리)이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그리며 도심에 생겨난 싱크홀과 이를 감지하는 메기까지, 톡톡 튀는 전개와 상상력이 돋보인다.

‘메기’는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제작한 인권 영화다. 이옥섭 감독은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준비할 때 인권위의 제안을 받고 ‘해방감을 느끼며’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2016년에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어요. 마지막 고를 수정할 때쯤 인권위에서 영화 제안이 왔어요. 뭐가 잘 안 풀리고 답답할 때 ‘메기’를 시작했고 하고 싶은 걸 다, 자유분방하게 시나리오에 썼어요.”

‘메기’는 인권영화답게 불법촬영 문제를 다루며 시작한다. 성관계 장면을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이 병원에 유포되며 이 사건을 쫓는 듯하던 영화는 이 문제를 매듭짓지 않고 연인, 친구 등 여러 관계 사이 신뢰의 문제로 건너가며 예측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이에 이옥섭 감독은 계몽적이지 않은 영화를 목표로 했다고 밝혔다.

“인권위가 청년의 인권과 삶이라는 키워드를 주면서 교훈적이지 않아도 되고,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이야기면 된다고 했어요. 장르도 상관없었고요. 창작의 자유도가 높아서 좋았어요. ‘인권영화’ 하면 무거워질 수 있는데 인권위는 경쾌하고 가벼운 터치가 되길 바랐고 제가 그런 영화라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의 축은 주연배우 이주영, 구교환, 문소리가 잡는다. 신뢰관계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표현해내는 세 배우는 이옥섭 감독이 처음부터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인물들이었다.

“이주영 씨는 처음에 ‘꿈의 제인’을 보고 좋았어요. 구교환 선배를 통해서 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하게 됐죠. 주영 씨의 첫인상은 자기 일을 잘하는 와중에 고민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끊임없이 고민하고 나아가려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윤영 캐릭터와 잘 맞을 거라 봤어요. 또 자기 상사(문소리가 연기한 경진)와 같이 뭘 해나가야 하는 캐릭터인데 강단 있는 면모도 보였고요.”

문소리의 경우, 이 감독이 영화와 연극을 섭렵한 팬으로서 언젠가 꼭 시나리오를 주고 싶었던 배우였다. 이옥섭 감독은 경진 캐릭터에 대해 “사랑스러울 수 없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사랑스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걸 소화할 사람은 문소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도 마음속으로 의지한 든든한 선배였다고도 전했다.

단짝으로서 2013년부터 단편영화 연출을 함께하거나 이 감독 작품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하는 구교환에 대해선 “글 이상의 표현을 기대하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테이크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제가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배우다. 제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시간도 단축되고 소통이 잘 된다”라고 영혼의 단짝 관계를 여과 없이 자랑했다.

특히, 이번 영화를 통해선 “구교환의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구교환이) 사랑스러운 역할을 많이 해왔는데, 전작들에서 앞과 뒤가 같았다면 이번엔 입체적”이라고 했다. 구교환 역시 이전 인터뷰를 통해 “이옥섭 감독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는 건 기쁨”이라고 말한 적 있다. 현장이 자유롭고 배우들이 신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다는 증언에 대해 이 감독은 자신이 “배우에 많이 기대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최소한의 약속만 하고 자유롭게 작업하려고 해요. 제 연출 스타일은 시나리오도 ‘한 단어라도 틀리면 안 된다‘ 같은 거 없고 다 까먹어도 돼요. 글은 활자일 뿐이에요. 종이 위의 글보다 살아 움직이는 연기를 더 신뢰해요. 시나리오는 제 머릿속에 있는 거고 백 퍼센트 일치하는 게 더 갑갑해요. 변하는 것, 우연성에서 흥미를 느껴요. 하지만 영화의 규모에 따라 달라지겠죠. 여태 찍어온 단편영화에선 약속이 더 적었다면 많은 스태프와 함께한 ’메기‘에선 약속이 더 많아졌어요.”

그래서인지 분량이 많지 않은 감초 역할에도 기꺼이 출연을 결정한 동방우, 권해효, 김꽃비, 심달기 등 이전 단편에서 만났던 배우들의 활약이 단연 돋보인다.

“이분들이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정말 다 출연해주셨어요. 큰 응원이 됐고요. 제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해주신 것 같아요. 권해효 선배님은 제가 헤맬 때 와서 괜찮다고 조언해 주시기도 하고, 너무 좋았어요. 제가 첫 장편이라 헤매기도 했을 텐데 의지가 됐어요.”

영화라는 생물을 다루며 이 감독은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를 시나리오로 옮긴다는 흥미로운 작업 방식을 설명했다. 이미지는 이 감독이 경험에서 파생된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예컨대, ‘메기’의 윤영 캐릭터는 이 감독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이미지고, 물고기 메기는 실제 봤던 뱀장어에서 파생된 이미지다.

“병원 로비에 있는 간호사의 이미지가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어요. 표정이 어둡고 어항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이미지에서 낯선 지점들이 떠올랐어요. ‘왜 표정이 어두울까’ ‘왜 어항을 보고 있을까’ 호기심이 생기면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종이에 떨어진 잉크가 퍼져나가듯이 윤영을 중심으로 세계가 만들어지는 거죠.

메기는 2014년에 ‘연애다큐’를 찍을 때 봤던 뱀장어에서 시작됐어요. 한 배우 분이 운영하는 오토바이 가게에 뱀장어가 있었어요. 한강에서 잡았는데 정들어서 키우고 있다고 하셨는데, 새롭게 느껴졌고 이게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메기가 됐어요. 간호사가 바라보는 어항 속에 메기가 있으면 어떨까 싶었고 ‘왜 어항 속 금붕어는 자연스럽고 메기는 낯설게 느껴질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영화 초반부엔 재개발에 반대하는 청년들의 시위 장면이 등장한다. 윤영과 성원이 스치듯 지나가는 장소에 푸른 방수천이 마치 바다처럼 깔려 있고 그 위에 파라솔과 썬베드를 가져다 놓은 청년들이 한때를 보내며 ‘재개발 반대’라는 염원을 평화 시위로 전한다. 이 역시 이 감독에게 인상 깊었던 한 장면을 영화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사진='메기' 속 시위 장면

“스무 살 때 광화문에 시위하러 간 적이 있어요. 광화문 근처 도로가 다 통제됐는데 시위 끝나고 사람들이 이야기 나누고 기타 치면서 노래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광경이 아름다웠어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과정이 좋았어요. 그 상황에서 받은 인상이 극대화된 게 ‘메기’의 시위 장면이에요. 저한텐 그 정도로 아름답게 남아 있었네요.

영화에선 재개발이란 문제를 깊게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윤영과 성원이 길을 지나가고 영화에 나오는 공간들을 보셨나요? 로케이션 다닐 때 어디를 보여줄지 고민했어요. 그들이 지나가는 곳이 그들이 속한 세계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인물들이 있는 곳에 (해당 장면 속)아름다운 청년들이 있다는 점이 표현돼도 충분히 행복해요.“

영화는 이옥섭 감독의 전작들과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유머다. 영화 속 윤영과 성원은 성관계 장면이 유포되며 사직서를 쓸까 고민하는 순간에도 한글, 한자, 영어로 사직서 봉투를 만들며 농담을 멈추지 않는다. 웃음은 이 감독이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제가 어릴 때 고모들이랑 살았는데 고모들이 정말 재밌어서 집안에 심각한 일이 벌어져도 웃겨줬어요. 그때 웃음이 없었다면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르는데, 좋게 기억에 남아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거든요. 그래서 ‘유머만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저는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웃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어떤 유머에 웃느냐‘는 걸로도 사람을 판단할 수 있어요. 저는 개그를 볼 때도 남을 비하해서 웃기는 건 진짜 싫어했어요. 구교환 선배와도 그 점을 항상 경계해요. 웃음은 중요하지만, 웃음거리가 되면 안 되는 거죠.“

첫 장편영화로 평단과 관객의 이목이 쏠리며 ‘이옥섭 월드의 시작’이라는 평에 대해선 “그렇게 불러주면 과찬”이라고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는 “집도 하나 못 지은 거 같다. 어떤 집이 만들어지고 어떤 사람들이 들어올지 저도 모르겠다”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내일 또 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쭉 작업할 거다. ‘메기’도 다음 신을 모르고 썼다. 결말도 염두에 없었다”고 했다.

“한 치 앞을 모르겠고 다음엔 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재미난 작업물이 나올 것”이라고 예고한 이옥섭 감독. 첫 삽을 뜬 이옥섭 월드가 어떤 집을 지어나갈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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