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영화계의 거장이자 칸, 베니스, 베를린 등 셰게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받은 에릭 쿠 감독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다. 자신의 첫 장편영화 ‘면로’는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섹션에 상영됐고 24년이 흘러 다시 한번 부산 관객을 만난다. 그 누구보다도 부산과 인연이 깊은 에릭 쿠 감독이 남다른 자신의 소감을 전했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 거장이라기보다는 편안한 ‘아저씨’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한손에 조니 워커가 담긴 컵을 들고 인터뷰 이후 저녁 식사를 즐길 생각에 들떠있었다. 인터뷰가 시작되면서 부산에 다시 왔다는 것에 그는 행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짧은 일정이지만 ‘면로’로 관객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겐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

“부산은 제게 제2의 고향같은 곳이죠. 셀 수 없을 정도로 부산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작년에는 지석상 심사위원 자격으로 영화제에 참여하게 됐죠. 올해 저의 첫 작품이자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섹션에 초청됐던 ‘면로’가 24년 만에 다시 관객들과 만나게 됐어요. 이번에 영화를 보시는 관객분들은 1회 초청 당시 어렸을 겁니다. 세대를 거쳐 ‘면로’가 많은 이들에게 보여질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복이죠.”

“이번에 상영되는 ‘면로’는 아시아 필름 아카이브에서 복원 작업을 진행해 재탄생됐어요. 당시에는 35mm 흑백 영상이었는데 컬러 보정됐죠. 저도 ‘면로’가 색을 입고 어떻게 보여질지 기대됩니다. 25년 전에 이 영화를 만들었지만 작품 속 내용은 지금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로맨틱한 사람이거든요.(웃음)”

‘면로’는 싱가포르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흑백 화면 속 현실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두 남녀는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오묘한 감정을 주고받는다. 에릭 쿠 감독의 섬세한 감정 연출은 보는 내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1회 부산영화제에 초청된 ‘면로’였지만 에릭 쿠 감독은 당시 부산에 오지 못했다. 자신의 커리어가 시작된 이곳에서 에릭 쿠 감독은 24년 만에 ‘면로’로 관객들과 이야기할 시간을 가지게 됐다.

“1회 영화제 때 ‘면로’가 상영됐지만 저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후회가 됐죠. 24년 만에 관객들과 ‘면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그동안의 한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죠. 그 시간동안 저는 아버지가 됐고 제 아들 에드워드 쿠는 만 25세의 영화감독이 됐어요. 내년에 제 아들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올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우리 가족: 라멘샵’을 제외한 제 모든 영화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됐어요. 만약 ‘라멘샵’이 상영됐다면 부산영화제의 유일한 전 작품 초청 감독이 되지 않았을까요?(웃음) 이번에 짧은 일정으로 참석했지만 꼭 와야겠다는 의지가 강했죠. ‘기생충’ 최우식 배우와 함께 한 ‘인 더 룸’으로 최근 부산을 찾았고 10회 때는 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과 심사위원을 맡았었죠. 그때는 영화의전당이 한창 만들어지고 있었죠. 정말 세월이 빠르다는 걸 느꼈어요.”

에릭 쿠 감독 영화에서 음식은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음식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감정과 상황을 대변하기도 하며 어떤 음식이냐에 따라 분위기까지 좌우하게 한다. 사람이 좋아하는 걸 하고 싶어하지 않나. 에릭 쿠 감독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영화에 집어넣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특별한 울타리를 치지 않았다. 세상이 변화함에 따라 에릭 쿠 감독도 그에 맞춰 변화하길 원했다. 영화를 만드는 건 감독이지만 영화를 즐기고 보는 건 관객이라고.

“제가 음식과 호러를 정말 좋아합니다. 최근 HBO 아시아를 통해 ‘FOLKLORE’ 시리즈를 만들었죠. 이 시리즈는 호러 장르예요. 그리고 아시아 감독들과 ‘FOODLORE’도 최근 촬영을 끝냈습니다. 음식에 관한 내러티브가 있고 여러 감독들의 연출이 더해져 드라마틱하기도 하죠. 음식과 호러를 저는 버릴 수 없습니다. 저한테 김치찌개를 주신다면 하루종일 먹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음식에 탐욕이 많습니다. 사실 전날 저녁에 양곱창, 닭백숙, 전복, 양고기 등을 한꺼번에 먹었어요.(웃음)”

“아시아 감독들과 같이 OTT플랫폼을 통해 더 많은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화인이라면 자신의 작품을 많은 관객이 보길 바라죠. 세상이 바뀌는 만큼 생각의 폭도 넓혀야 합니다. 봉준호 감독이 넷플릭스와 함께 ‘옥자’를 만들었고 마틴 스콜세지, 코엔 형제 같은 거장들도 OTT플랫폼과 함께 했습니다. 이 모든 게 ‘창작의 자유’ 때문입니다. OTT플랫폼은 감독에게 전적으로 창작의 자유를 제공하잖아요. 이와 반대되는 의견도 이해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24년 동안 에릭 쿠 감독은 부산과 함께 했다. 그만큼 부산영화제에 대한 애정도 크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동남아, 중앙아시아 등 주목받지 못했던 지역의 영화들을 많이 초청했다. 에릭 쿠 감독은 이런 영화제의 변화와 선택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지난 세월 동안 부산에서 겪었던 일들을 하나둘 끄집어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부산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 느껴졌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물론 세계 여러 영화제가 특정 국가에 포커스를 맞춰 영화를 보여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故 김지석 프로그래머도 동남아 영화들을 BIFF에 많이 소개했죠. 올해 부산영화제는 제 고향 싱가포르는 물론 동남아, 중앙아시아 등 다양한 곳의 영화들을 상영합니다. 다양성을 보여주는 영화제의 기능을 제대로 하는 것이죠. 저 역시 처음에 영화 두 편을 만들고 나서 싱가포르 신인감독들을 프로듀싱 해줬습니다. 신인감독이 성장할 수 있게 방향성을 제공하는 건 정말 중요하니까요.”

“24년 동안 부산과 함께 하면서 참 많은 걸 보고 느꼈습니다. 영화제가 작게 시작해 큰 발전을 이뤘고 최근까지도 ‘성장통’을 겪었잖아요. 이젠 과거는 과거로 묻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故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산영화제는 충분히 고통을 이겨내고 제 자리를 잘 잡았습니다. 제가 많은 영화제를 다녔지만 이만한 영화제는 없었으니까요. 저한테는 아시아 최고 영화제 아니 ‘영화제의 아이비리그’라고 생각합니다.”

# ‘면로’를 부산에서 보고 싶다면?

10월 5일 오후 1시 30분 메가박스 해운대(장산) 1관

10월 10일 오후 4시 30분 메가박스 해운대(장산) 4관

사진=김수(라운드테이블)

저작권자 © 싱글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