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공룡을 연상케 하는 민머리 패션모델 겸 디자이너 기무(본명 박기문)가 8일 패션의 본고장 이탈리아 밀라노로 떠났다. 출국 전 꿈으로 지은 옷을 걸친 그를 성수동 싱글리스트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올해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인 기무는 20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열정적으로 살아왔으니 이제 30대를 해외 무대에서 시작하고 싶다는 소망을 꺼내놓았다. 현지 모델 에이전시인 아이러브모델, 인디펜던트, 브레이브, 메이저, 몬스터로부터 미팅 연락이 왔다. 런던과 파리 쪽은 직접 부딪혀서 해결해볼 요량이다.

“앞서 현지 에이전시에 휴대폰으로 촬영한 정면, 측면, 뒷모습, 클로즈업, 상의탈의, 전신사진 및 워킹 영상, 프로필을 보냈는데 연락이 왔어요. 만들어가야 할 커리어라든가 ‘모델 끝판왕’을 보려면 해외 진출을 해내야할 거 같아서 계속 생각해왔던 거예요. 바쁜 스케줄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이번에 작심을 한 가죠.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일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여기고요.”

모델 출신 래퍼 박성진으로부터 많은 영감과 조언을 얻었다. 한혜진, 수주 등과 비슷한 시기에 유럽진출에 성공, 해외 유명 패션쇼 무대에 서며 모델링을 한 그는 꿋꿋이 자기 갈 길을 가는 쿨한 선배다. 과거 그가 진행한 예능프로 ‘스타일 라이브’에 팬으로서 출연하며 인연을 맺은 뒤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

중학생일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학창시절 동네에는 쟁쟁한 셀럽들이 몇몇 있었다. 친구들인 시스타 소유, 배우 정진운 위하준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연예인 지망생들이었고 기무는 옷을 특이하게 입어 유명세를 탔다.

“그땐 영어교사가 꿈이었어요. 영문과에 진학하려고 단국대에 합격했는데 집안 사정상 포기를 했어요. 그러곤 전문대 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어요. 과거 제 옷 취향을 가지고 욕했던 애들을 찍소리 못하게 만들 명분이 필요했어요.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그런데 옷 만드는 과정이 너무 재밌고 제 적성과 잘 맞더라고요. 군 제대 후 복학해서는 덜컥 과 수석까지 차지했죠.”

졸업 후 김우빈 이종석 등이 모델로 활동했던 디자이너 브랜드 206옴므에서 가죽재킷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이후 신성통상, 송지오 브랜드를 거쳐 최근까지 2년 7개월간 삼성물산 에잇세컨즈 디자인실 계약직 디자이너 겸 피팅모델로 활동했다.

186cm 65kg의 이상적인 신체조건을 지닌 그는 2017년부터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모델 활동을 병행했다. 나만의 디자인 철학을 보여주기 위해 개인 브랜드 ‘기무’도 론칭했다. 본명 ‘기문’의 일본식 발음(일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 가와구보 레이, 이세이 미야케를 좋아한다)이자 ‘기무사령부’라는 권위적 느낌을 강조하고 싶어서 직접 지었다. 이 이름을 모델 예명으로도 삼으면서 인지도가 올라갔다.

“디자이너를 하면서 모델을 동시에 하니 잘 안풀렸어요. 퇴로(디자인)가 있으니까 모델생활에 몰입을 안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포토그래퍼들에게 혼나면서 배워나갔어요. 경험이 없다보니 남성복 촬영인데 캐주얼하게 포즈를 취한다든가 그런 식이었죠. 워낙 신체적으로 타고난 친구들이 많아서 자존감이 무너질 때가 많았죠. 저의 경우 개성 있는 페이스라 옆에 항상 잘생긴 모델을 붙여놓고 찍는데 반응이 달라요. 그 친구들은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잘 나오니 그게 처음엔 불만이고 상처였죠. 그러다 나만의 메리트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패션브랜드 모호컴퍼니가 그를 꾸준히 모델로 기용했다. 원래 긴 머리였던 그에게 브랜드 디자이너가 “얼굴이 공룡처럼 예쁘게 생겼는데 왜 머리로 가리느냐. 밀어 버려라”라고 주문해 미련 없이 쇼 전날 삭발해버리고 런웨이에 섰다. 그때부터 ‘개성파’란 레테르가 붙여졌고, ‘모델 기무’를 향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영국의 천재적인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과 그의 컬렉션, 무대연출을 좋아했다. 그가 우울증 끝에 충격적으로 생을 마감한 뒤에 그의 디자인 철학을 이어나가겠다는 취지로 팔에 타투까지 감행했다. 이제 기무만의 아카이브가 됐다.

기무는 현재 개인 브랜드도 차곡차곡 준비 중이다. ‘기무’에서는 주로 대중적인 제품보다 자신이 입었을 때 어울릴 법한 튀는 디자인에 주력했다면 브랜드명을 ‘주린 키무’로 바꾸면서 소비자가 탐낼 만한 미니멀한 스트리트 웨어에 집중할 계획이다.

모델로서도 성취할 소망이 주렁주렁이다. 디올 옴므, 셀린느, 프라다 등 슬림한 모델이 지배하는 런웨이에 서고 싶은가 하면 럭셔리 브랜드 베르세체, 보테가 베네타, 디스퀘어드2처럼 섹슈얼한 남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무대에서도 캣워킹을 하고 싶다.

나름 인생이 탄탄대로였다가 모델을 하면서 인생의 밑바닥을 쳐본 것 같아 지금까지도 상처로 남아 있다는 그는 최근 쉐보레 등 CF도 몇편 작업했으니 교정기를 빼고 머리를 길러 커머셜한 이미지를 앞세워 광고모델로도 활약하고 싶다는 욕망을 내비친다.

또한 빠트릴 수 없는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는 30대에 개그맨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의 꿈인데 그동안 주변에 너무 말하고 다녀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연기에도 욕심이 있어 예능과 드라마에 대한 욕심도 키우는 중이다.

“욕심이 많아요. 열정은 넘치고요. 열심히 하는 대신 포기할 건 과감히 포기해버리는 확고한 성격이죠. 유럽 패션무대에 잘 소프트 랜딩해 후배 모델들을 위한 길을 닦아주고 조언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겨요.”

적지 않은 나이에 꿈을 향해 한발을 성큼 내디딘 ‘공룡 청년’의 도전이 어떤 성취를 이룰지 궁금해진다.

사진= 지선미(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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