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물결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며 크고 작은 움직임들을 만들었다. 공연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류였던 남성 중심적 시선이 주요 소비층인 2030여성들에게 지적받기 시작했고 소수의 목소리를 조명하는 공연이 확대되며 다양성을 이끌었다.

남성 주인공의 성애적 상대역으로만 기능하던 여성 배역의 서사를 강화하는가 하면 아예 여성 주인공이 극을 이끌어가기도 했다. 또 본래 캐스팅 시 남성-여성으로 규정됐던 역할을 바꿔 연기하는 ‘젠더프리’ 공연으로 형식의 다양성을 꾀하는 사례도 늘었다. 한편 성소수자, 장애인 등 그동안 다뤄지지 못했던 사회 소수자의 이야기를 폭넓게 다루려는 시도가 두드러졌던 한 해였다.

사진='호프' 김선영의 캐릭터 포스터

# 여성서사 강화...호프' '스웨그에이지' '메리 제인'

다수의 뮤지컬과 연극에서 여성 캐릭터의 이야기를 강화하는 행보를 보였다. 올해 초연된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하 '호프')은 대표적으로 여성서사를 강조한 작품이다. 1월 초 개막한 '호프'는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를 두고 벌어진 원고 반환 소송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현대문학의 거장 요제프의 미발표 원고를 두고 주인공 70대 노파 에바 호프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이 벌이는 30년간의 재판을 그렸다. 여성의 자아 찾기라는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뤘고 에바 호프 역을 연기한 관록의 배우 김선영은 올해 '예그린 뮤지컬 어워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사진='메리 제인' 캐릭터 컷

이외에도 6월 개막한 창작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의 진 역시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의 탄생을 알렸다. 마치 국정농단을 연상케하는 시국의 가상의 조선이 배경인 '스웨그에이지'의 진은 백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주체인 시조대판서의 딸인 동시에 사회 개혁을 꿈꾸는 세력들과 활동하며 자유와 탈피를 부르짖는다.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아버지와의 대립도 마다하지 않으며 목소리를 내는 진의 모습은 큰 울림을 안겼다.

이달 초 막을 올린 연극 '메리 제인'은 장애인 아들을 둔 여성의 삶을 다룬다. 극중 메리 제인의 아들은 미숙아로 태어나 중증 뇌성마비를 앓는다. 그러나 메리 제인은 옆에서 그녀를 돕는 8명 여성들과의 연대를 통해 긍정과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배우 예수정을 필두로 이봉련, 정재은 등 9명의 전 배우가 여성으로 구성되며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 서사 극화에 힘썼다.

사진='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공연 모습

# 젠더프리 캐스팅...'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오펀스' '해적'

남성이 남성 배역을, 여성이 여성 배역을 연기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시선은 어디서 온 걸까. 이에 의문을 품은 연출가들은 젠더프리 캐스팅을 꾸준히 시도해왔고 시대의 흐름을 타고 2019년 한국 공연계의 화두가 됐다.

대표적으로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동명의 총체극은 발레리나 김주원과 소리꾼 이자람을 캐스팅하며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은 각각 도리안과 유진 역을 맡았고 함께 캐스팅된 4명의 남성 배우들과 총 8가지의 페어를 만들며 고정된 성 역할에 대한 선입견을 약화했다.

8월부터 재연된 연극 '오펀스'도 초연 땐 남성 배우만 연기했던 것과 달리 3명의 여성 배우가 무대에 오르며 전엔 남성의 배역을 여성이 맡아도 각 배우의 특징과 역량이 다를 뿐 극의 흐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또 '해적'도 성공적인 창작 뮤지컬 젠더프리 사례로 꼽힌다. 올해 3월 초연되고 11월부터 재연에 들어간 '해적'은 초연부터 젠더프리 캐스팅 2인극으로 공연되며 화제가 됐다. 18세기 해적의 황금시대에서 카리브해를 주름 잡던 해적들의 이야기를 그리며 아버지를 따라 해적이 되고 싶은 루이스와 능수능란한 총잡이 앤은 김순택, 임찬민, 백기범이 연기한다. 거칠어 보이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선장 잭과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검투사 메리는 랑연, 현석준, 노윤이 맡았다.

사진='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공연 모습

# 성소수자·장애인 이슈...'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인정투쟁' '앙상블"

올해는 한국 퀴어문화축제(프라이드축제)가 20회를 맞은 중요한 분수령의 해였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하지만 문화계는 꾸준히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전하며 약진해왔다.

아마 성소수자(LGBT)를 다루는 공연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헤드윅'과 연극 '프라이드'도 각각 국내 12번째, 4번째로 공연되며 다시금 성원받았다.

트랜스젠더 담론을 다루는 연극 '후회하는 자들'도 이달 7일부터 공연되고 있다. 극 중 미카엘은 50세의 나이에 성전환 수술을 받았고 올란도는 2번의 성전환 수술 끝에 지정 성별이었던 남성으로 살아간다. 극은 60대 두 인물이 느끼는 후회와 성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며 의문을 던진다.

초연 중인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은 드랙퀸을 다루는 연극이다. 엘비스 프리슬리를 동경하던 주인공 케이시는 얼떨결에 여장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가 눈부신 디바로 변모한다. 어려운 형편에서 백인 남성 가수를 흠모하던 케이시가 드랙퀸이라는 정체성을 수용하며 당당하고 용기 있는 인간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감동을 준다.

사진='인정투쟁: 예술가편' 공연 모습, '앙상블' 포스터

더불어 장애인 인권을 다룬 연극들도 소소하게 상연되며 고민할 거리를 던져줬다. 제8회 두산연강예술상 공연부문 수상자 연출가 이연주의 신작 '인정투쟁: 예술가 편'은 강보람, 백우람, 강희철, 김원영, 김지수, 하지성 등 신체 장애인들이 배우로 등장한다. 제목 그대로 예술가로서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을 펼치고 그로써 느끼는 희노애락을 표현하며 예술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이 시대 인정의 의미는 경쟁에 방점이 찍혀 있지는 않은지 의문을 던진다.

극단 산울림의 창단 50주년 기념 연극 '앙상블'도 있었다. 지난 10월 중순까지 한 달여간 공연된 '앙상블'은 가족의 일원이 지적 장애를 겪을 때 벌어지는 어려움과 갈등 양상을 아주 현실적인 동시에 너무 무겁지 않게 그렸다.

장애를 지닌 아들 미켈레 때문에 집을 나갔던 딸 산드라는 결혼을 통보하며 몇 년 만에 돌아오고 엄마 이자벨라에게 오빠를 시설로 보내라고 요구한다. 이자벨라는 지적장애가 비정상이라는 통념에 반기를 들지만 하루가 달리 아들을 돌보며 힘에 부쳐가는 것도 사실이다. 장애 자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건드리기보단 장애인 구성원에 대한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가족들의 삶과 갈등을 그림으로써 현실에서 이 문제와 마주하며 고민하고 있을 수많은 실제 가족들을 돌아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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