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옷가게를 하던 177cm의 한 청년이 어느 날 모델이 됐다.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이 넘치는 모델계에서 그가 성공할 거라고 장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177cm의 청년은 모델계에서 톱을 찍으며 런웨이를 휩쓸었다. 바로 배정남(34)이다. 4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이제는 배우로서의 재도약을 꿈꾸는 배정남을 만났다.

배정남은 영화 '보안관'(감독 김형주)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세련된 모델 이미지를 완전히 벗고 입만 열면 깨는 춘모 역을 맡았다. 영화 '보안관'은 부산 기장을 배경으로 오지랖 넓은 전직 형사 대호(이성민)가 서울에서 내려온 사업가 종진(조진웅)을 의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수사물이다.

여태까지 맡은 역 중 대사가 가장 많다며 기뻐하는 그에게서 지난 4월 26일 방송된 MBC '라디오스타'의 순박한 모습이 겹쳤다. 안티가 많았던 배정남은 '라디오스타' 출연 이후 종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호감'으로 재탄생했고, 제2의 전성기가 시작될 것을 예고했다.

 

 

"형님들이 평소에 네 모습 그대로 하라는 말대로 한 것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봤을 땐 재밌었나 보다. 너무 감사하다. 기대도 안 했는데, 조금이나마 영화에 보탬이 돼서 뿌듯하다. '슈얼 와이낫'은 유행어가 될 줄은 몰랐다. 그게 또 긍정의 말이기도 하다. 그냥 좋다. 언제 또 유행어를 만들어 보겠나."

거침없는 부산 사투리가 그의 인기 요인으로 꼽히고 있는 와중에, 서울살이를 오래 한 연예인이 여전히 부산 사투리를 유지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표준어나 서울말을 익히려는) 시도는 많이 했다. 그런데 서울말을 하니까 내 모습이 안 나오더라. 점잖아지고, 목소리 톤도 가벼워지고, 말도 시원하게 못 하겠더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느낌이다. 그래도 연기할 때는 몰입에 안 어긋날 정도로 한다."

그는 영화 '보안관'에서는 오랜만에 그의 본래 말씨인 부산 사투리를 한껏 사용했다. 그 덕에 대사를 구사하는 데 있어서 훨씬 편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어리숙하고 촌스러운 춘모를 완성하기 위해 그는 쫄티를 입고 태닝을 하고 금목걸이를 착용했다.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모델 이미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나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깨고 싶었다. 모델을 했으니까 쟤는 저런 것밖에 안 어울릴 거라는 선입견이 있다. 거기에 대고 '봐라, 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하고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에서 진짜 못생기게 나오고 싶었다. 살도 7, 8kg 정도 찌우고 그랬다. 잘생긴 것, 옷을 멋있게 입는 건 많이 해봐서 매력을 못 느끼겠더라. 사람들이 봤을 때 쟤가 배정남인가 싶을 정도로 변신하고 싶었다."

'보안관'을 통해 배정남은 모델에서 배우로 변신할 수 있을까. 그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연기적인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며 일화를 풀었다. 촬영장의 훈훈한 분위기와 감독과의 자유로운 소통이 연기에 발전을 가져다줬다는 그의 고백에서는 '보안관'팀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초반보다 후반부에 연기가 늘었다. 처음엔 긴장을 많이 해서 자연스럽지 못했는데 감독님이 편하게 해 주셔서 잘 나왔다. 형님들도 내가 뭘 할까 말까 고민하면 그냥 하라고 하면서 자신감을 많이 북돋아 주셨다. 막내가 설친다고 욕먹을까 봐 주저한 게 많았는데, 나중에 얘기하니까 다들 '야 해. 숨기지 말고 해!' 하시더라. 팀을 잘 만난 것 같다. 어디 가서 대사 애드리브로 잘못 하면 원래 욕먹는다."

배정남은 이날 시종일관 시원시원하면서도 솔직 담백한 말투로 인터뷰에 임했다. 거짓과 가식을 싫어한다고 딱 잘라 말하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매력이 담뿍 느껴졌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그였지만 어린 시절에는 고생도 많았다.

 

 

"공장에서 일하고 인력사무소 다니고 그랬다. 스무살 고3 겨울에 친구랑 둘이 인력사무소 가니까 고등학생은 이만 이천원을 준다고 하더라. 대학생은 삼만 원인데. 그래서 대학생이라고 속이고 일했다. 공사장 반장한테 밀쳐지고 넘어지면서 참 서러웠다. 삼만원 받으면 오천원은 또 사무소에서 떼간다. 끝나고 이만오천원 들고 사천원짜리 고기 뷔페가서 친구랑 소주 한 잔 하고 그랬다. 그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서울에 처음 왔을 때도 혼자서 잘 버틸 수 있었다."

배정남은 자신이 촬영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미련 없이 흘려버리는 타입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된 데에는 남다른 계기가 있었다.

"힘들었을 때 같이 일하던 매니저가 도망을 갔었다. 한동안 패닉상태였다. 그때가 스물 다섯 살이었는데, 문득 지금 잘돼서 톱을 찍으면 나중에 무너졌을 때 다시 못 일어날 거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잘됐다 싶었다. 남들 나중에 겪을 거 빨리 겪었다, 하늘이 준 기회다 생각했다. 그때부터 많이 바뀐 것 같다. 그 전엔 빨리 성공하려고 초조했는데 지금은 안 그렇다."

한편 배정남은 배우 강동원과도 모델시절부터 친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같은 부산 출신이며, 현재 소속사도 YG케이플러스로 같은 곳이다. 강동원은 예전부터 여러 매체를 통해 배정남을 '썩기 아까운 배우'라고 칭하며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되게 고맙다. 형도 부산 사람이라 앞에서는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못 한다. 무심한 척해도 뒤에서는 좋은 얘기를 해 주니까 참 고맙더라. 연기할 때도 도움을 많이 준다. 형이 먼저 읽고 시범을 보여준다. 내가 생각 못 했던 부분을 많이 배우게 된다."

배정남은 배우로서의 자신은 아직 배우는 단계라며 겸손한 자세에 머물렀다. 무리해서 큰 역할을 하는 거보다 작아도 잘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진중하게 대답했다. 아직 눈에 띄는 역을 맡지 못해 초조할 법도 한데 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연기에 대한 욕심이 없지는 않다. 욕심이 없으면 배우 하면 안 된다. 욕심이 있지만 천천히 가는 거다. 연기할 때가 행복하다. 그 행복을 천천히 느끼고 싶다."

사진 이완기(라운드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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