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주춤했다. 흥행 부진과 전작들에 비해 미미한 존재감은 뼈아프게 남았지만,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은 분명 그 전환점이 될 영화다.

칸 영화제 진출로 그 개성과 완성도를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설경구의 출연작이 칸에 초청받은 것은 '박하사탕' '오아시스' '여행자'에 이어 네 번째다. '불한당'에서 설경구는 교도소에서 만난 잠입경찰 현수(임시완)와 손을 잡은 후 믿음과 배신을 오가는 조직원 재호를 연기했다.

 

 

"칸이 살렸죠. 너무 의외의 결과라 더 기뻤어요. 범죄액션은 너무나 흔한 장르다보니 '왜 우리가 칸에 가?' 되물었어요."

칸은 두 인물의 감정선에 집중하고 스타일 면에서 차별화시킨 '불한당'에 주목했지만, 처음부터 그 차별성을 확신하긴 어려웠다. 설경구는 언더커버(잠입)를 주 소재로 잡은 '불한당'이 다른 남성 누아르들과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출연을 망설였고, 그를 설득시킨 것은 변성현 감독의 자신감이었다. 

"'나의 PS 파트너'를 만들었던 감독이 갑자기 누아르를 한다니 의아했어요. 결이 너무 다른 영화고, 경험이 많은 편도 아니니까요. 함께 소주 한잔 하면서 새벽까지 얘기를 나눠보니 본인만의 매력이 있는 사람이고 자기확신이 뚜렷하더군요. '누아르가 아니고 감정에 더 집중할 거고, 스타일과 미장셴이 확실한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그냥 지르는 말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고, 그 차별성이 분명했어요. 그 말을 믿으면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 있긴 했으니, 저도 모험을 한 거죠."

 

 

'차별성 있는 누아르'를 만들기 위한 치열함은 '불한당'에서 영화 곳곳에서 여실히 묻어나온다. 하이라이트 몇 장면이 있는 대신, 그 전체를 독특한 톤으로 감싸안는다. 설경구는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 있느냐는 물음에 "좋은 그림이 많다"며 여러 장면을 손에 꼽았다. 이는 스태프들의 고민과 작업 덕분으로, 치열한 회의를 거쳐 나온 콘티로 촬영이 더욱 수월해졌다. 설경구는 영화경험이 많지 않은 편인 젊은 스태프들의 열정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감독님은 두번째 상업영화고, 촬영감독님은 독립영화 '4등' 후 작품이예요. 조명감독님은 제가 '역도산' '오아시스' 때 완전 아기였고요. 기분이 희한하더라고요.

콘티 작업부터 치열했어요. 다들 고집이 세서 한 컷을 그리는데도 수월하지가 않아요. 미장셴 때문인 것 같은데, 미술감독이 콘티 작업을 같이 하는 걸 처음 봤어요. 제가 뭘 물어보면 조명감독까지 들어와서 설명해줄 정도였고요. 너무 궁금해서 보여달라고 했더니 만화를 보듯 술술 넘어가서, '이렇게 찍으면 되겠구나' 싶었죠. 촬영은 오히려 쉬웠어요. 빛에 따라 원하는 그림을 잡기가 참 어려운데, 미리 다 세팅해놔 수월히 진행했죠. 정성을 담은, 좋은 장면들이 많아요."

화면에 설경구의 얼굴을 담아낼 때도 그 접근방식이 달랐다. 앞모습으로 찍었어야 할 장면들에 모조리 옆모습이 나갔다. 늘 본심을 숨기고 사는 재호를 담아내기 위함이다. 

""이렇게 살려고 한 게 아니라 살려고 이렇게 된 거다"는 재호의 대사 자체가 그를 설명해주는 것 같아요. 늘 꾸며낸 웃음으로 불안함을 감추려 하죠. 제 옆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영화에서 옆모습을 그렇게 많이 들이댄 게 처음이었어요. 단독 포스터도 옆모습으로 찍었어요."

 

 

'불한당'을 다른 남성 누아르와 다르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지점은 재호와 현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이다. 변성현 감독은 '불한당'을 두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멜로영화"라고 했고, 설경구 역시 "브로맨스 이상이다"고 표현했다.  

"멜로란 얘길 듣고 저희는 깜짝 놀랐어요. 그럼 누가 로미오고 줄리엣이지?(웃음) 그 말을 이제야 들어서 다행이죠. 촬영 전에 들었으면 헷갈렸을 것 같거든요."

촬영 전에 김희원 씨가 난 '경구형을 쭉 짝사랑하는 걸로 콘셉트를 잡았다'고 툭 던진 적이 있었어요. 재호가 뭘 하라고 하면 병갑(김희원)은 이유도 묻지 않고 따르고, 재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행복해하죠. 그 얘길 들으니까 난 현수를 사랑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농담 전 진담 반으로 삼각관계가 됐죠." 

촬영 전 농담으로 여겼던 말이지만, 재호와 현수가 서로를 속고 속이며 갈등과 화해가 반복되는 걸 보면서 설경구 또한 독특한 감상을 느꼈다.

"현수에게 첫눈에 뿅 갔던 게 아니라 서서히 눈에 들어온 거라 생각해요. 40대 중반까지 살면서 유일하게 믿고 싶어진 사람인 거잖아요. 재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감정없는 캐릭터였는데 현수가 나타난 후 이따금 고민하고 진심도 툭툭 내뱉어요. '(현수가) 착해서 그래. 너나 나같은 새끼랑은 달라' 그런 대사들을 보면 감정이 흔들리는 게 느껴지죠. 결말도 그래요. 목숨 내걸고 하는, 그게 사랑 아닐까요?"

 

 

멜로를 방불케 하는 감정으로 함께한 임시완은 열정적인 파트너다. 설경구는 "후배 임시완을 어떻게 이끌었냐"는 질문에 손을 내저었다. 

"임시완은 제가 이끌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워낙 철저히 준비해와서 어떻게 호흡을 맞춰야 할지 고민해 본 적이 없어요. 임시완 자체가 워낙 열정적이라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새벽 3~4시에도 감독에게 전화해서 수화기를 든 채 연기를 해요. 전 그 나이땐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이창동 감독님같은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어쩔 수 없이 열심히 하게 됐던 거지.(웃음)"

17일 개봉을 앞둔 설경구의 고민은 관객의 높은 기대치다. 칸 영화제 진출을 비롯해, 리뷰 기사에 극찬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설경구는 "인간의 내면에까지 파고든 리뷰도 많고… 그 정도는 아닌데 기대감이 높아 걱정이다"면서도 진심어린 마음을 전했다. 

"욕심을 내자면 여운이 남는 영화였으면 해요. 보통 범죄액션은 보고나서 '재밌었다' 할 텐데 '이 영화는 왜 이렇게 자꾸 생각나지?' 하셨으면 싶어요."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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