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넘겨 도착한 장례식장은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차분했습니다. 냉장고에 가득 음료수가 채워져있었고, 상 위에 깔린 흰 종이엔 접시 자국 하나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울음섞인 탄식이 가늘고 길게 이어질 뿐 너무 조용해서 상갓집같지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는 살아있을 때에도 속됐으되, 세속과는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젊지만 가난했고, 팍팍한 삶이었을 텐데 마치 오늘만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표정엔 그늘이 없었지요. 신기했습니다. 그러던 며칠 전, 말하는 토끼의 방문처럼 한밤중에 그의 부음이 날아들었습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검은 양말을 신고 택시를 타고 달려가는 동안 나는 원더랜드의 앨리스처럼 지끈지끈 골이 아팠더랬지요. 믿기지 않아서, 아직 눈물은 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지만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

 

죽음을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드시나요? 저는 어렸을 땐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감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어른이 되면서부터는 슬프고 처연한 감정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전히 죽는다는 사실은 공포입니다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에서 예외는 없으니까, 몸서리치며 외면할 일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하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

 

 

이 책은 행복하게 죽을 권리에 대한 책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 다시말하면 병들었거나 노쇠했거나 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남은 날들은 잉여의 시간입니다. 곧 죽을 사람이라는 시선 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의 찬란한 욕망은 스스로 거세해버립니다. 하루하루를 '죽을 날'을 바라보며 더욱 우울하고 더욱 치사스럽고 더욱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살아있지만 행복하지 않으니까요. 곧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일 없다고들, 생각하니까요.

 

그런 생각은 대단히 잘못됐다고 저자(아툴 가완디)는 강조합니다. 생의 마지막에 놓인 사람이야 말로 가장 행복해야 한다고, 그들의 마지막 존엄을 빼앗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스탠포드, 옥스포드, 하버드에서 각각 윤리학과 철학, 의학을 공부한 저자는 자신의 조모, 아내의 조부모의 케이스부터 의미있는 사례들을 수집해서 한 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 죽음의 공포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품위있고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에 대한 화두입니다.

 

"집단문화는 엄청난 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지속성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집단문화에는 혁신의 싹을 질식시키는 힘이 있다"

 

병원과 의원, 요양원에 깊이 뿌리박힌 '노약자=잉여'의 집단문화는 당장 힘겹고 무모해보일지라도 깨나가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사례와 함께 담담하게 자기고백도 풀어냅니다. 읽으면서 이 사람이 환자를 대할 때 얼마나 사려깊을 지 상상해보곤 했습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있을 뿐, 죽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숨이 붙어있는 한 산 사람입니다. 우리가 삶에 대한 주도권을 갖고 마지막까지 가치있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질 겁니다. 우리가 사라지고 난 이후의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면서 눈 감을 수 있다면 마지막이 꽤 근사하지 않겠습니까.

 

문상객 몇이서 장례식장을 나와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우리에겐 내일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늪같은 그곳에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무겁게 돌아오는 길, 삶이 치사한지 죽음이 치사한지 울컥울컥 마음이 엉키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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