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속말'의 최대 수혜자." 권율은 '법비(法匪, 법을 악용해 권력을 휘두르는 무리)'를 소재 삼은 SBS 드라마 '귓속말'에서 변호사 강정일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강정일은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우고 죽음까지 몰아세운 악랄한 인물이었지만, 그를 미워할수만은 없었던 것은 그 본인 역시 나름의 고민 안에서 치열하고 고단한 삶을 견뎌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강정일은 자신의 사랑과 야망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물론 범법 행위를 정당화할 순 없지만 어딘가 짠한 것은 강정일의 마음아픈 인생과 권율의 연기 덕분이었다.

25일, '귓속말'을 마친 권율을 만났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위해 5~6kg를 감량했다는 권율은 한결 샤프해진 외모였지만, 밝고 유쾌한 모습은 그대로였다. 

'명량' 이순신의 아들 이회, '한번 더 해피엔딩'의 지적인 의사, '반전' 욕쟁이 사무관을 연기한 '식샤를 합시다2'…. 선하고 부드러워보이는 권율의 얼굴 속엔 다양한 모습이 들어있다. '귓속말'에서는 지상파 미니시리즈에서 첫 악역을 맡아 활약했다. 여기엔 남다른 캐릭터 분석이 있었다. 

"강정일은 감정의 진폭이 큰 인물이죠. 어떻게든 자신의 목표를 향해 쭉 달려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동물적으로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 이성으로 분노의 폭을 누르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권율은 "'귓속말'엔 절대선도 악도 없다"는 박경수 작가의 말처럼, 강정일을 악역으로 규정짓지 않았다. 그저 목표를 위해 달려가다보니 해선 안 될 행동도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 이로써 강정일의 싸늘한 눈빛과 차분하지만 뼈 있는 말투가 살아났다. 특히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 감정의 극한을 표현해내기 위해 권율은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보냈다.

"다른 작품 때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혼자 밥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걷기도 했고요. 집에서도 방문을 닫고 혼자 있으려 했어요. 제가 예민해져서 혼자있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예민해지려고 혼자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원래 성격은 혼자 있는 걸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예요.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고 집에 있을 때도 친구들을 부르죠. 밥도 혼자 먹지 않고요."

 

 

'귓속말'에서 권율은 '차진' 대사 소화력으로도 호평을 받았다. '펀치' '추적자' 등을 써낸 박경수 작가는 도치형의 촌철살인 대사를 맛깔나게 살려냈다. 대본을 수십번 들춰보는 경험은 중앙대 재학 시절 연극을 공연했던 때를 떠오르게 했다. 

"늘 공부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대본을 외운다기보단, 이 장면에서 작가님이 무엇을 얘기하고 싶으셨던걸까 그 의중을 파악하잔 생각으로 접근했어요. '밥 먹었어?'란 대사가 있다면, 앞뒤 상황과 뉘앙스를 고려해 '네가 감히 밥을 먹고 와?'란 뜻으로 받아들이는 식이죠. 대본을 하나하나 뜯어봤어요. 연극할 때 대본을 하루에 수십번, 수백번 봤던 것처럼요."

"대본이 너덜너덜하겠다"고 말을 건네니, "그 정도는 아니다. 요즘 제본이 잘 돼 있다"며 너스레를 떤다.

인터뷰 내내 권율은 유쾌하고 밝았다. 원래 성격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둥글둥글한 성격이다. 권율은 예민한 캐릭터를 맡았다고 해서 촬영장에서까지 동화되는 것을 경계하려 했다.

"제가 예민한 캐릭터를 표현하며, 혹시나 연기가 아닐 때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봐 걱정했어요. 그런데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의 끝까지 상상하고 간접적으로 그려가는 과정을 겪다보니 저도 모르게 예민해지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치 아침에 뿌리고 나온 향수의 향을 저 말고 주변 친구만 느끼는 것처럼. 주변에서 이해를 많이 해 줘서 감사하죠. 극이 끝났으니 더 밝게 지내려고 해요."

 

 

이명우 PD가 권율을 캐스팅한 것은 영화 '사냥'에서 보여준 '확 도는' 찰나의 눈빛 때문이었다. 바로 전작인 '싸우자 귀신아'에서 사람좋은 얼굴의 이중적인 살인마를 연기하긴 했지만, 대부분 작품에서는 부드럽고 귀엽고, 지적인 캐릭터를 주로 맡아 왔다. 권율은 두 작품 연이어 악역을 맡으며 느낀 고충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처음엔 악역이 재밌고 카타르시스가 있었어요. 제 안의 본성을 꺼내서 함부로 해도 칭찬을 받으니까.(웃음) 그런데 감정적으로 힘들더군요. 많은 분들이 아셨으면 좋겠어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게 미움받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걸."

'귓속말'로 극한의 감정연기를 펼쳤다보니,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는 액션물, 혹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 당긴다. 

"'베를린' '용의자' '본 시리즈'를 재밌게 봤어요. 계속 뛰고 매달리면서 제대로 몸을 혹사시키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물론 '어바웃 타임' '이프 온리' 같은 말랑말랑한 로맨스나 코미디도 좋고요. 강정일은 나사가 너무 조여져있다보니 좀 풀려있는 역도 하고 싶은거죠."

'귓속말'은 최고 시청률 전국 20%를 돌파하며(닐슨코리아 기준) 최근 방송된 미니시리즈 중 드물게 인기를 끌었다. 권율 역시 영화 '명량' 이후 다시금 높은 관심을 받게 됐다.

"작품이 워낙 사랑을 받아서 따라오는 격려라고 생각해요. 칭찬이라기보단 제가 아등바등했던 것에 대해 예쁘게 봐 주시고, 수고했다고 해 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민폐는 끼치지 않았구나, 다행이다 싶고 감사해요."

작품 선택에 기준이 있기보단 그때그때 끌리는 작품을 선택한다는 권율은 임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귓속말' 이후 다음 작품에서도 치열한 연기를 볼 수 있을 듯하다. 

"'귓속말'을 시작할 때, 뭔가를 이루겠다는 특정 목표를 세우기보단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절실하게 연기하겠단 생각만 했어요. 어떤 작품이든 제가 끝까지 열심히 한다면 좋은 필모그래피로 남을 것이고, 허투루 하면 부끄럽게 되겠죠? 매번 그런 후회가 남지 않도록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사진 라운드테이블(지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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