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가 한두 개쯤 풀린 표정의 교정기를 낀 미옥(일명 장만옥)이라곤 여겨지지 않았다. 배우 이민지(29), 화려한 미모는 아니지만 김고은 박소담 한예리가 그렇듯 무쌍에 하얀 캔버스 같은 얼굴이다. 어떤 색의 붓칠이든 다 받아주는. 독립영화 '꿈의 제인'(5월31일 개봉)의 소현을 입은 그와 마주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남녀배우상(구교환 이민지),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을 휩쓸며 올해의 발견으로 주목받은 '꿈의 제인'은 잔인한 현실을 전전하는 가출팸, 트랜스젠더의 우연한 만남과 위로를 몽환적이면서도 극사실주의 시선으로 터치했다.

이민지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워 사람들과 어울리려 아등바등하는 10대 소녀 소현을 맡아 세 차례에 걸쳐 변주되는 극 전체를 이끌어간다. 무표정에 말없음표가 지배하는, 어수룩한가 하면 어두운 현실에 일찌감치 눈떠 눈치 백단인 묘한 캐릭터다.

“조현훈 감독님과는 '인디포럼' 뒤풀이에서 처음 만났어요. 그때 감독님은 단편영화 ‘서울집’으로, 전 다른 작품으로 초청 받았거든요.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몇 년이 흘러 전화가 왔어요. 장편을 준비 중인데 만나고 싶으시다고요. ‘서울집’도 가출청소년 이야기인데 연장선인 느낌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트랜스젠더 제인 역 배우가 궁금했는데 2014년 ‘뎀프시롤: 참회록’에서 공연했던 구교환씨라고 해서 흥미로웠죠.”

 

'꿈의 제인'에서 소현을 연기한 이민지(왼쪽)과 트랜스젠더 제인 역 구교환

자신의 캐릭터보다 제인이 더 눈에 들어왔다. 충무로가 눈여겨 보는 배우 겸 감독 구교환이 연기하면 제인이 특별하게 나오겠다는 기대가 충만했다. 느릿하지만 단단한 내면이 느껴지는 말이 이어졌다.

“제인, 지수, 팸 아빠인 병욱 모두 개성 강한 캐릭터들인데 감정 표현이 없는 소현은 표출할 거리가 없는 인물이라 부담스러웠어요. 자칫 잘못하면 지루해질 수 있겠다 싶어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죠. 하지만 소현마저 튀면 이야기가 중구난방이 될 거 같아서 보여주려 하기보다 최대한 화자의 느낌으로 가려 했어요. 대신 감독님이 클로즈업을 많이 사용해주셔서 미묘하고 정확한 감정표현을 보여줄 수 있었죠.”

10대 청소년, 그 삶을 살아본 적 없는 가출팸에 대한 이해는 숙제였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접했던 가출팸은 비행 청소년 느낌으로 다뤄지곤 했는데 그런 건 아닐 거라 여겼다. 일반적인 10대를 연기할 때 특유의 말투를 참고하면 되는데 어렸을 때부터 부모 없이 자라 사회성을 배우지 못했던 소현은 여러 모로 어려웠다.

“튕겨져 나간다는 느낌을 갖고 성장한 아이라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감정 표현을 못하게 되고, 가족구성원에 집착하는 상실과 박탈감, 결핍 많은 친구라고 이해했어요. 애잔했죠. 소현이 처음으로 진심을 얘기하는 장면에서 ‘방법을 모르겠어’라고 훅 내뱉는 대사는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연극을 하고 싶어 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영화·드라마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재밌는 일을 오래 하고 싶다’ 정도였다. 하지만 동기들은 마인드가 달랐다. 능력, 외모에서 특별한 친구들이 워낙 많아 자존감은 곤두박질쳤다. 휴학을 선택했다. 2008년 무렵, 단편영화를 연출하는 한예종 영상원 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때부터 쉴 틈 없이 단편, 독립영화에 매진했다.

“2013년 ‘세이프’를 끝내고 보니 20대 중반이 돼 있었죠. 대학도 졸업했고요. 이젠 연기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단 결심이 서더라고요. 이때부터 직업의식을 갖고 작품에 임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10년의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버렸어요. 숱한 작품에 참여했고, 함께한 감독님들이 상도 많이 받는 등 좋은 일들이 많았어요. ‘응팔’이 잘돼서 이름까지 알려지며 지금껏 이어져온 것 같아요.”

이 시기 많은 배우들과 교류하게 됐다. 단편 ‘기린과 아프리카’에 출연한 한예리의 팬이 됐고, 영화제와 감독들을 매개로 무명이던 김고은 박소담과 만나 인사를 나눴다. 2010년엔 첫 장편영화 주연작인 미스터리 스릴러 ‘짐승의 시간’으로 박해일과 호흡을 맞췄다.

 

 

“고은씨는 ‘은교’로 데뷔하기 전이었는데 무척 순수하고 예뻤어요. 선악이 공존하는 얼굴이랑 호기심이 들도록 하는 면모 때문에 이상형으로 여겨온 박해일 선배님은 너무 편하게 대해주셨어요. 연말연시에 촬영이 이뤄졌는데도 아무런 불평 없이 임하셨어요. 케이크도 사주시고.(웃음) 그 이후에도 가끔 연락을 해주세요. 제가 더 성장하면 선배님과 다시 공연할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해요. 선배님처럼 쓰임새가 많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특히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대중의 눈도장을 얻게끔 해준 보석 같은 작품이다. 단편·독립영화에서 친숙해진 배우들과 공연하게 돼 마음이 편했던 것과 더불어 우울한 사회적 약자를 주로 연기했던 그에게 “밝은 역할도 잘 하네”란 인식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

“‘꿈의 제인’ 이후엔 감정을 표출하는 재밌고 독특한 역할을 하고 싶어요. 예상을 뛰어넘는 캐릭터라면 더욱 좋겠거요. 전 이름이나 얼굴이나 보통 사람 느낌이 강해요. 그래서 소시민 역할들을 주로 했고요. 이젠 배우 이민지 하면 떠오르는 뭔가를 만들어가야 할 시기인 듯싶어요.”

 

사진 한제훈(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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