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믿기지 않는 배우라는 말보다, 나이가 어울리는 배우라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다. 눈웃음이 해사하던 미남 배우는 파격과 반전에 연이어 도전하며 어느덧 깊이까지 가진 배우가 됐다.

'관상'의 수양대군, '암살'의 대장 염석진, '인천상륙작전'의 대위 학수 등으로 '갑'의 위치에 섰던 이정재(44)가 이번엔 영화 '대립군'을 통해 조선 시대 을 중의 을, 대립군의 수장 토우로 분했다. 대립군은 남의 군역을 대신 치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요즘으로 치면 비정규직과 비슷하다.

 

 

"사실이다. 정규 군인이 아니었으니까. '너희가 열심히만 하면 포졸도 시켜 주고 군관도 시켜주겠다' 이런 달콤한 말들을 하는데, 이건 '너 일 열심히 하면 내가 너 정규직으로 써 줄게'랑 같은 말이다. 가난하기 때문에 이들이 이렇게 힘들고 아파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영화는 1592년 임진왜란, 명나라로 피란한 임금 선조를 대신해 임시조정 분조(分朝)를 이끌게 된 세자 광해(여진구)와 생존을 위해 남의 군역을 대신 치르던 대립군이 참혹한 전쟁에 맞서 운명을 함께 나누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톤 잡기가 되게 애매했다. 조금만 어긋나면 마당쇠나 돌쇠 같은 느낌이 났다. 너무 전형적인 사극톤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아주 새롭게 가면 거친 대립군의 느낌이 안 났다."

2013년 개봉한 영화 '관상'은 이정재의 대표작 중 하나다.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수양대군은 첫 등장신부터 강렬한 인상으로 관객들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특히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대사는 많은 패러디를 양성할 정도로 이정재와 수양대군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런 만큼 이번에 연기하는 토우에서 수양대군의 느낌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터였다.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위협적으로 말하는 목소리 톤은 좀 비슷할 수도 있다. 그건 피해갈 수 없다. 대신 그 안에서 최대한 다르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대립군으로 뽑혀서 온 사람들은 다 못 살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인솔하려면 얼마나 세져야 되겠나. 그래서 강인한 모습을 보여야 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토우도 인간인지라 전쟁터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표정에 항상 두려움의 눈빛이 있어야 했다."

이번 영화에서 이정재는 광해를 연기한 여진구와 호흡을 맞추며 거의 매 장면을 함께 했다. 한편 여진구는 이정재의 섬세한 눈빛 연기를 뺏어오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얘기를 꺼내자 이정재는 "그 친구가 더 잘할 것"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도 잘 해내고 있다. 벌써 가진 걸 또 뺏어가겠다는 건 무슨 심보냐.(웃음) 여진구씨는 일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아주 진중하다. 젊은 친군데도 열정이 있다. 촬영장에서는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촬영 끝나면 식사를 하거나 반주 한 잔을 하면서 그런 대화의 분위기를 많이 가지려고 노력했다."

 

 

반대로 여진구에게 뺏어오고 싶은 게 있냐고 묻자 그는 "풍부한 감정을 뺏어오고 싶다"고 진지하게 답했다. '대립군'에서 토우는 광해의 정신적인 성장을 이끌어내는 캐릭터였다. '대 선배' 이정재는 여진구에게 어떤 멘토였을까.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해서, 경력이 더 있다고 해서 이렇게 하면 어떠냐 저러면 어떠냐 하는 건 실례라고 생각한다. 당사자한테 직접적으로 얘기하진 않고 연출자한테 얘기한다. '광해가 여기서는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광해가 조금 더 의연해야 하는 건 아닌가'하는 식이다. 나는 뭔가를 얘기해주고 싶어도 직설적으로는 잘 안 하고 질문으로 한다. '야 이게 좋은 거야'라고 말하기보다 '이게 좋은 건가?' 하고 묻는 식이다. 답을 가르쳐 주는 것보다 질문으로 그 사람이 스스로 찾게끔 만드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데뷔한 지 20년을 훌쩍 넘긴 그는 충무로의 베테랑 배우다. 남에게 가르침을 받기보다 남을 이끄는 역할이 더 익숙한 위치다. 그런 그에게도 멘토냐 있냐고 묻자 그는 여진구나 김무열에게도 느끼고 배우는 게 많다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후배들로부터 배우는 선배 이정재는 동시에 후배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2016년 5월 배우 정우성과 의기투합해 '아티스트 컴퍼니'를 설립했다.

 

 

"회사를 참 만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이 자주 찾아온다. 같이 저녁도 먹으러 가고, 대본도 같이 읽고 토론도 한다. 건강한 모임인 것 같다. 신인 배우들이 뭘 가져오면 기성 배우들이 한 번씩 돌아가면서 봐 주고 그런다. 부탁을 받아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생기는 것 같다."

이정재에게 '암살'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세 번 연속으로 시대극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그는 시대극을 선호하진 않는다며, 오히려 최근 가장 찍고 싶은 건 멜로라고 답했다.

"영화하는 사람끼리 모이면 그런 얘기를 한다. 40억 정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영화들은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쉽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기획 단계에서 투자가 안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계속 규모가 큰 느낌이 나는 시나리오들이 훨씬 더 많이 기획되는 것 같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아쉬워한다. 제일 손해 보는 게 멜로다. 그런 것들이 많이 기획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기가 너무 어렵다."

한편 영화 '대립군'(감독 정윤철)은 오는 31일 개봉한다.

 

사진 제공=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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