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김옥빈의 영웅은 배우 임청하였다. 홍콩에 가면 사람들이 다 날아다니는 줄 알았고, 소림사에서 수련하면 절대무공의 고수가 될 거라 생각했다. 홍콩영화를 즐겨봤던 김옥빈은 또래들과 칼싸움을 하며 컸다.

 

 

그런 김옥빈에게 원톱 액션물 '악녀'는 드디어 찾아온 소중한 작품이다. 8일 개봉하는 하드보일드 액션물 '악녀'에서 김옥빈은 뛰고 찌르고 날아다니며, '한풀이'를 하듯 모든 근육과 무기를 사용해 적을 해치운다. '여성 액션'의 새 역사를 쓴 배우 김옥빈을 지난 30일 만났다. 

'악녀'는 10년 후 자유를 주겠단 약속을 믿고 임무를 수행하던 숙희가 자신을 둘러싼 음모와 비밀을 알게 된 후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다. 김옥빈은 전체 촬영분의 90%를 차지하는 액션을 대부분 대역 없이 소화했다. 

"여성 원톱 영화라니. 현재 영화계에 여성의 역할이 축소돼 있다보니 정말 이 시나리오가 내게 온 걸까,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굉장히 좋아했고 많이 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재능을 보여드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합기도, 태권도 유단자로 운동을 좋아하는 김옥빈이지만 '악녀'에는 더욱 각별한 준비과정을 거쳤다. 촬영 시작 3개월 전부터 액션스쿨에서 훈련을 받았고, 그 결과물은 영화에 고스란히 들어갔다. 와이어 줄 하나에 의지해 공중에 매달렸고, 달리는 자동차 위에서 온몸을 내맡겼다.

김옥빈은 가장 힘들게 찍은 장면으로 마을버스 액션신, 요정(料亭) 액션신을 꼽았다. 마을버스 내부에서 적과 싸우고, 요정에선 얌전히 한복을 입고 있다가 비녀를 뽑아든다. 

"마을버스가 굉장히 좁은데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다 들어갔다. 부딪히면 너무 아프더라. 촬영 감독님은 나중엔 뷰파인더도 안 보고 감으로 촬영하시더라. 현장이 좁아서 바로 모니터를 못 했다보니 영화에서 어떻게 나올지 굉장히 궁금했다. 

소복 액션은 처음 보는 신인 것 같다. 칼에 비해 비녀의 면적이 좁다보니, 끝을 뭉툭하게 했는데도 쥐고 찌르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또 맨살을 드러낸 채 찍은 장면이라 아무리 살살 때려도 두드러기처럼 자국이 남더라. 스턴트 배우 분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하면서 찍었다."

 

 

숙희는 단도, 장총, 쌍검, 기관총, 도끼 등 사용한 무기도 다양하다. 가장 만족스러웠던(?) 무기는 쌍검과 도끼다.

"다 좋았는데 쌍검이 가장 잘 맞았고, 완성된 영화를 보니 도끼도 좋더라. 여자가 도끼를 다루는 걸 잘 못 봤던 것 같은데, 우악스럽고 괴이하기도 하면서 굉장히 좋았다.(웃음)"

70여명의 적을 해치우는 오프닝 롱테이크신은 1인 시점으로, 김옥빈의 모습이 나오지 않아 후시녹음에만 참여했다. 실감나는 기합을 위해 볼펜을 칼 삼아 휘두르며 녹음한 덕분에, 볼펜 몇 자루가 부러졌다. 

'악녀'는 이번 제70회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진출한 작품이기도 하다. 외신 기자들은 '악녀' 속 액션장면 하나하나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표했다. 또다른 해외 액션영화에 이제 '악녀'를 참고로 한 신이 등장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악녀' 측은 김옥빈의 액션준비와 촬영을 '생고생'이라 표현했지만 정작 배우 본인은 쿨했다.

"촬영 땐 반 미쳐있었다. 너무 재밌었고, 새로 합이 주어지면 설렜다. 위험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니 안전불감증처럼 위험한 걸 모르게 되더라. 그래도 긴장감과 사고는 계속해 경계해야 했다. 특히 전문 스턴트 배우 분들은 내가 뭘 하든 다 받아줄 걸 아니까 안심이 되지만, 배우들 간 액션을 할 때 긴장이 된다. 또, 감정과 액션을 함께 연기해야 해서 긴장되기도 했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카메라 워킹부터 다 익히고 촬영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악녀'에선 액션 못지않게 드라마도 중요했다. 숙희는 사랑하는 중상(신하균)에 대한 맑고 순수한 감정을 연기하는 한편, 극단의 감정연기도 소화했다. 

"숙희는 중상 외의 남자를 경험해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중상은 숙희의 온 세계인 거고, 남녀 사이의 감정이라기보다 다른 종류의 사랑이란 느낌이 있었다. 한국영화가 '리얼리티'에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다보니, 사람을 어마어마하게 죽이는 숙희에게 어떻게 맑은 느낌을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주인공은 뭘 해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처럼, 액션이 갖는 판타지가 있으니 좀 상쇄된 것 같다."

김옥빈은 '고생'에 대해 생색을 내지 않았다. 남들이 말하는 '슬럼프'에도 "힘들었던 적은 있었겠지만 그리 컸던 적은 없다. '모든 건 때가 있겠지' 하면서 잘 놀러다녔다"고 웃으며 답했다.

'악녀' 준비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힘든 준비 과정을 겪어냈는지 설명하기보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했는데도 서양 배우들처럼 근육이 붙지 않아 아쉽다"며 씩 웃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런 김옥빈도 이번에 제대로 액션을 맛본 만큼, 훈련한 내용을 더 써먹고 싶다고는 덧붙였다. 

"7월에 액션스쿨에 들어가 12월에 나왔다. 액션 작품이 몇 개 더 들어왔으면 좋겠다. 한 작품 하고 배운 걸 썩히는 게 너무 아깝지 않나.(웃음) 써 주시기만 한다면야 삭발도 가능하다."

 

 

사진=라운드테이블(지선미)

저작권자 © 싱글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