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의 기대주 타이틀을 거쳐 연기파로 입지를 다진 지금도 소신 있는 활동으로 뚜벅뚜벅 걷는 배우 변요한(31)이 이번엔 미스터리 스릴러로 관객에게 다가선다. 개봉과 함께 첫날 박스오피스 1위를 장악한 '하루'(감독 조선호, 6월 15일 개봉)는 모처럼 만에 한국 영화가 선전하는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시체스영화제와 판타지아국제영화제에 연속으로 초청되며 입소문이 난 이 작품은 변요한의 열띤 에너지를 과감하게 분출한다.

'하루'가 개봉하기 일주일 전인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변요한을 만났다. 영화 내내 뜀박질하고 다치고 악을 지르는 민철 역을 소화하느라 고생 깨나 했을 것 같던 그가 나긋한 말투로 '굉장히 힘들었다'며 고백해 웃음을 자아냈다.

 

'하루'는 끔찍한 하루가 여러 번 되풀이되고, 매일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타임루프' 소재를 적용했다. 매일 눈을 뜨면 딸이 교통사고를 당하기 2시간 전의 상항을 반복하는 남자가 자신처럼 시간에 갇힌 또 다른 남자를 만나 타임 루프에 얽힌 비밀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어쩌다 보니 극장에서 개봉한 두 작품이 연달아 '시간'을 소재로 사용했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2016)로 시간을 소재로 한 작품을 찍어봤던 적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고서 타임루프와 타임슬립에 대해 확실히 구분을 짓고 들어갔어요. 타임슬립은 시간을 거슬러 돌아갈 능력이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오갈 수 있다면 타임루프는 수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걸 기본적으로 익혔죠"

가장 먼저 시나리오를 건넨 이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함께 합을 맞춰온 김명민이었다. 드라마에서 호위무사 역할을 해서인지 충성심이 발휘돼 흔쾌히 응했다. 시나리오는 후루룩 읽혔다. 헷갈리면서도 어려웠지만, 결국 이 시나리오를 선택하게 된 건 영화 제목부터 드러내는 반복되는 '하루' 소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분석하다 보니 다큐멘터리 같더라구요.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게. 마지막에 전달하는 본질적인 메시지는 결국 사랑이고 용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미워하고 죽여버리겠다고 달려들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사랑이자 용기라고 생각했거든요. 거기서 흥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타임루프는 그저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고요"

 

아내의 죽음을 매일 지켜봐야 하는 민철. 아내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폭발적인 감정으로 일관하는 인물이다. 첫 촬영 전에는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기로 유명한 변요한은 민철의 감정이 가늠 안되는 탓에 '이거 어떡하지' 싶어 시나리오를 던져버리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솔직히 글로만 봤을 땐 쉬웠어요. 그런데 연기할 걸 생각하니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런데 명민 선배님과 강에서 만나는 장면을 처음으로 촬영하게 됐는데, 저보고 멱살을 잡으라고 하시더라구요. 명민 선배님은 한 달 전부터 촬영을 하고 계셨었거든요. 선배님 믿고 나오는 대로 감정 연기를 하다 보니까 민철의 감정이 제 안에서 쌓이는 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명민 선배님이 한 발짝 빠져 밸런스를 맞춰주시면 내가 활개를 쳐야하는구나… 생각했었죠"

타임루프는 배우들에게 여간 어려운 장치가 아닐 수 없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보조 출연자들과 함께 같은 상황을 조금씩 다르게 찍는 식으로 촬영이 진행된다. 연기로 정평이 난 명배우 김명민도 힘들었다고 고개를 젓지 않았나. 변요한 또한 고역임을 체감했다.

"굉장히 거추장스러웠어요. 힘들었죠. 드라마만 쭉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다시 깨어나면 똑같은 장소에 와있는 거잖아요. 한 곳에서, 또 한 날에 촬영을 미리 다 해버리는 식으로 촬영했는데, 그걸 다 맞춰서 연기하기가 힘들더라구요. 다행히 명민 선배님께서 한 달 전에 먼저 촬영을 들어가셔가지고 제가 디딜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셨어요. 덕분에 편하게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여배우들처럼(?) 남자 배우 복이 많다는 소리가 따라다닌다. 배우라면 누구나 함께 합을 맞춰보고픈 대선배들과 운 좋게 연달아 작업했다. 지난해 개봉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선 김윤석과 함께 했고, 이번 작품에선 무려 김명민이다. 기라성 같은 두 선배를 존경심을 갖고 관찰하다 보니 관록의 공통점이 엿보였다.

"두 분 모두 꾸밈없고 멋부리지 않으세요. 가장 기본적이고 정확한 연기를 하시는 것 같아요. 현장에서 굉장히 심플하셨는데, 그렇게 하기가 되게 어렵잖아요. 김윤석 선배님을 보고선 책임감과 예민함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시는 걸 보고 많이 배웠죠. 명민 선배님과는 '육룡이 나르샤' 때도 함께 연기한 적 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질문을 드렸어요. 몇 년 연기하신 거냐고. 그게 가능하냐고 여쭈니 가능하다고 하세요. 시대가 바뀌면서 문화의 흐름도 바뀌고, 너무 많은 트렌드가 계속 생겨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연기를 해나갈 수 있었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사랑한다'와 '미안하다'라는 대사, 진부한 듯 보여도 강력한 힘을 가진 말이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말들을 많이 하게 된다.

"요즘엔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한다, 미안하다 말을 많이 해요. 어떻게 보면 제가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구요. 사실 되게 쉬운 말인데도 어렵게 느껴지는 말이잖아요. 남자들끼린 낯간지럽기도 하고요. 얼마 전 누구한테 끝까지 응원하고 사랑한다고 했는데, 전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내가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면 내게도 감동이 온다는 걸 느꼈어요"

부모님께도 마찬가지다. 다작을 하면서부터 연기자의 길에 오르는 걸 반대하신 부모님이지만 촬영을 하다 보면 감사한 마음이 생겨났다.

"'미생' 찍을 때까지만 해도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드렸어요. '육룡이 나르샤' 끝나가면서부터 했던 것 같아요. 칼질을 하는데,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체력의 한계를 느껴서(웃음). 그냥 너무 행복하더라구요. 배우들은 심장이 터질 듯이 힘들 때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아요. 이렇게 건강하게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아버지께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더니 답장으로 'ㅇㅋ' 하시더라구요(웃음)"

 

독립영화계의 아이돌에서 '미생' 성공 이후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로 상엽 영화 주연 데뷔작을 치르고 이번 영화 ‘하루’에서 폭발적인 연기력을 보여주며 당당히 상업영화 주연 배우로서 자리매김했다. 과연 그는 스스로 상업 영화에 잘 안착했다고 느낄까.

"글쎄요. 아직 안착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아니, 영원히 안착은 못할 것 같아요. 요즘은 많이 고민하는 시기예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가고, 나를 좀 더 사랑하고 싶고, 취미도 여러 개 가져보고. 그래서 복싱도 하는 거구요. 연기를 오래 하고 싶다고 해서 오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상업영화에 안착했다고 안주하기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작품을 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제 선택에 책임을 지고 싶고요. 영화를 통해 메시지나 공감을 전할 수 있는 연기 활동을 하는 것이 제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인 것 같아요"

 

사진 = CGV아트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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