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향은 쿠미, 성격은 후미코예요."

 

 

'박열'에서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다 후미코를, '동주'에선 윤동주의 시집 발간을 돕는 후카다 쿠미 역을 맡은 배우 최희서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문학을 사랑해 지금도 글쓰기를 좋아하고, 어린시절엔 여자라고 무시하는 또래에 맞서 싸우는 대담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박열'의 주인공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두 사람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해 항일운동을 했던 일본인 여성으로,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다. 최희서는 어린시절 일본 생활을 바탕으로 한 유창한 일본어 연기와, 대사를 모두 히라가나화해 외우며 일본인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혜성처럼 나타난 '괴물 신인'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최희서는 2009년 '킹콩을 들다'로 데뷔해 100여편의 드라마, 영화, 연극에 출연해온 실력파다. 그러나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터라, '박열'의 캐스팅은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에 출연했던 최희서는 '박열' 준비를 자발적으로 돕던 중 캐스팅됐다. 

"후미코에 대해 알아갈수록 너무나 연기하고 싶었죠. 감독님께서도 '네가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투자 문제도 있는데 저처럼 인지도 낮은 사람이 캐스팅될 수 있을까 싶어 기대하지 않으려 했어요. 그러다 연락을 받았죠. 분명히 반대가 있었을텐데 감독님께서 밀고 나가신 게 아닐까, 너무 감사했어요."

'박열'은 지난 1월 9일부터 2월 17일까지, 24회차만에 촬영을 마쳤다. 주연인 이제훈(박열), 최희서, 김인우(미즈노 렌타로)의 경우 하루 5신, 많으면 11신까지도 찍었을 정도다. 순간순간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는데, 그 무게가 대단했다. 

최희서는 "'박열'은 어마어마한 행복과 압박감을 동시에 준 작품이다"고 표현한만큼, 다방면에서 노력을 기울였다. 강인하면서도 순수한 후미코는 최희서와 이준익 감독이 함께 해석한 결과다. 

"감독님께서 첫 리딩 후 참고하면 좋을 캐릭터들을 소개해 주셨어요. 영화 '길', '길버트 그레이프',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주인공이었죠. 제가 느낀 후미코는 멋있고 강인한, 조금은 조숙한 사람이었는데 이 셋의 공통점은 솔직하고 순진무구하단 점이었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허한 매력을 참고했죠."

또 경북 문경에 위치한 후미코의 묘소와 박열기념관에 수 차례 다녀오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처음엔 캐스팅 후 부모님과 함께 갔었고, 크랭크인하기 전에 다시 가니 시나리오와 후미코의 자서전을 읽은 후라 그런지 마음이 더 아프더라고요. 그 다음엔 도움을 주신 박열기념관 연구원 분을 뵈러 갔었는데, 마음이 더- 안 좋은 거예요. 아무도 찾지 않을 법한 산자락의 묘지인데, 마치 제 오랜 친구를 잃었는데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어요. 앞으로도 자주 가지 않을까 싶어요."

'박열'은 최희서의 첫 장편 주연작이기도 하지만, 애정이 남다른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박열'의 제작진은 철저한 고증을 위해 당시의 기사 내용과 재판 기록을 요청해 모두 읽었는데, 최희서 역시 이 작업을 함께했다. 무대인사 때는 일본 일행들을 위해 통역으로 나서는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열'에 후미코의 내레이션이 나오는데, 실제로 어떤 단어를 썼는지 알고 싶어서 원문 기록을 쌓아두고 읽었어요. 어떤 부분은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한 장을 읽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죠. 영화에 당시 재판기록을 그대로 살리기도 했어요. 다테마스 판사와의 신문 중 '인간은 인간의 자격 하나로 평등하다'는 대사인데, 감독님의 양해를 구해 당시 기록을 대사로 옮겼죠."

'박열'과 함께한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시간. 그동안 조연을 맡으면서는 얻기 힘든 기회였다. 그 노력의 흔적은 책꽂이에 가득 찬 대본노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희서는 매 작품마다 대본 최종본이 나오면 가장 먼저 대본노트를 만든다. 노트에 대본을 스크랩하고, 여백에는 자신의 생각과 캐릭터에 대한 첫인상, 감독의 코멘트 등을 적는다. 

"예전엔 많아도 6~7신 분량이니 아무리 열심히 적어도 노트 한 권을 못 채웠어요. '박열'에서 처음으로 노트를 넘치게 썼죠. 대본을 붙여놓느라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는 노트를 보면서 중압감도 느끼면서, 제가 짊어져야 할 무게라고 생각했어요."

생각할수록 후미코를 만난 것이 최희서에겐 뜻깊다. 영화계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진취적인 여성 주역이란 점도 그렇다.

"많은 관객분들이 좋아해주신다면 후미코처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캐릭터가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요? 제 주변 여자배우들도 늘 '역할이 없어서 오디션조차 못 본다'고들 말해요. 지금은 여성 캐릭터가 몇 없는데, 역할도 더 늘고, 선입견을 깨는 진취적인 캐릭터가 주가 되는 작품이 1년에 3편 정도만 나와도 좋을 것 같아요."

최희서는 올 여름 '박열'뿐 아니라 '옥자'로도 관객을 만난다. '옥자'에서는 통역사 역할을 맡아 짤막히 등장한다. 드라마 '설국열차' 오디션도 봤는데 연락이 없어 떨어졌다고 짐작한다.

5개 국어가 가능해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지 않을까 싶었는데, 최희서는 오히려 한국영화계에서 일하고픈 마음이 크다고 했다. 또 연세대 졸업과 5개 국어에 능통해 붙은 '뇌섹녀'란 별명보단 배우로서의 수식어를 갖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당분간의 일정은 '박열' 무한 홍보고요. '동주'에 이어 '박열'에서도 일본인을 연기했는데 이젠 한국어 연기를 좀 하고 싶어요. 한국어 연기를 안 하다보니 주변 분들이 '최희서는 한국어가 특기야'라고 하실 정도거든요.(웃음)"

사진=라운드테이블(지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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