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를 마치고 달려왔단다. 인적조차 드문 토요일(8일) 오전 10시 힙플레이스 망원동의 작은 카페에서 만난 얼리버드 정하담(24)의 첫인상은 ‘사진발’과 ‘본판’의 간극이 어마무시하게 크다였다. 어둡고 강렬하며 각이 진 느낌과 달리 실제론 이목구비와 선이 뚜렷한 정도다. “특이한 얼굴이란 말은 연기하면서 듣기 시작했다”고 털어 놓는다. 또래답게 밝으면서도 기품이 고개를 내민다.

 

 

6일 개봉한 ‘재꽃’으로 박석영 감독의 ‘꽃’ 3부작에 마침표를 찍었다. “개봉해서 좋은데 진짜 끝나는 느낌이라 아쉽다”고 말하는 눈에 진한 감정이 묻어난다. “관객이 별로 없어서 왠지 아쉬운 마음이 더 든다”고 덧붙인다.

“원래 생각하고 3부작을 만든 건 아니었으나 어떻게 하다 보니 3년 동안 그 캐릭터를 연기했고, 이 시간들이 각별하고 애틋해요. 처음에 감독님을 만났을 때는 연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렇게 출발해 지금은 사람들이 나를 배우로 인지하고 있으니 큰 변화가 이뤄진 거죠. 연기에 대한 직업의식, 배우라는 직업을 더 가깝게 느끼고, 뭔가를 하고 싶은 열망이 커졌다는 것도 달라진 점이고요.”

‘들꽃’(2015)의 가출청소년 하담, ‘스틸플라워’(2016)의 거리에서 홀로 살아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소녀 하담에 이어 ‘재꽃’에서 하담은 한적한 시골마을로 흘러들어온 어린 소녀 해별(장해금)을 끌어안는다. 앞선 2편이 동정 없는 세상에 홀로 맞섰다면 ‘재꽃’에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연대의 과정을 그렸다.

 

 

“‘들꽃’에선 오랫동안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던 사람이었고 ‘스틸플라워’에선 생존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인물이었고 ‘재꽃’에선 타인에 대해 사려 깊으며 마음이 넓은 사람이에요. 연기할 때 캐릭터의 핵심적 성격, 특징을 이해하는 게 관건인 듯해요. 3편의 하담은 앞선 하담들과 같은 인물일 수도, 다른 인물일 수도 있어요.”

배우가 하나의 인물로 연작에 출연하는 건 보기 드문 기회다. 연기경험 없던 신인은 3부작 주인공을 맡으며 영평상 신인여우상,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을 수상하며 ‘한국 독립영화계의 별’로 주목받았다. 개성적인 외모와 존재감 덕분일 테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보면 의식세계가 견고해서 내심 놀라게 된다.

“연기는 그 인물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잖아요. 이 상황에서 왜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그 인물을 이해하는 과정인 듯해요. 이전까진 그렇게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본 적이 없어요. 답답하고 어려운데 가치 있단 생각이 들어요. 그의 영혼과 내 마음이 가깝게 닿은 부분이 남아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더욱 그렇고요.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했던 마음이 남는 게 연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가치 있고요.”

 

 

‘들꽃’ 때는 한달 동안 허름한 옷을 입고 큰 가방을 든 채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인물에 대한 생각을 계속 했다. 노숙자인 줄 여긴 사람들이 질겁하거나 기피했다. ‘스틸플라워’ 때는 캐리어를 싸는데 노력했다. 세면도구, 도시락, 옷가지, 이불 등 정갈함을 추구하는 하담을 표현하는 키(Key)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재꽃’이 제일 어려웠다.

“‘스틸플라워’와 이어진 인물인데 풍파를 겪고 나서 훌쩍 커버려서요. 상처가 끝난 느낌? 더 이상 힘들지 않고 괜찮은, 사람이 커진 느낌이었어요.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 연대감을 간직한 하담은 훨씬 나보다 크고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 연기할 때 그런 감정들이 확 느껴지며 마음도 아팠어요.”

시골마을의 삼촌 집에 자신의 방을 꾸미고 지내는 그를 표현하기 위해 충남 당진에 1개월간 머무르며 하담처럼 품앗이하러 다니며 파를 다듬고. 밭일 체험을 했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그곳에서 사색적이고 풍성해지는 느낌이 새록새록 들었다. 마음의 평화를 얻은 시간이었다. 그러다보니 점차 여유롭고 따스하게 작품 준비가 이뤄졌다.

최근 봉준호 감독이 그를 두고 “소문대로 존재감이 정말 대단하다. 여태껏 접해본 적 없는 아주 새로운 유형의, 그 어떤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느낌의 배우라는 느낌이 든다”고 극찬해 화제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그분의 영화를 봤는데. 봉준호 감독님이 그렇게 말해주셔서 신기하고 기뻤어요. 너무 감사한 한편 영화에 대한 관심에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스틸플라워’ 이후부터 하기 시작했어요. 전엔 그냥 역할에만 집중하며 열심히 했고요. 제 이미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이하다고 말씀들 하시는 얼굴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무게가 한몫하지 않았을까요. 캐릭터에 빚진 느낌이에요.”

정하담은 ‘꽃’ 3부작 틈틈이 김기덕 감독의 ‘그물’, 김지운 감독의 ‘밀정’,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등 세계적인 명감독들과 연이어 작업했다. 앞으로 함께 작업하고픈 감독은 누가 있을까.

“무서우실 줄 알아서 긴장 많이 하고 가만히 있었어요.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데 세 분 모두 친절하게 말 걸어주시고 젠틀하셨어요. 기회가 되면 이경미 감독님과 함께 해보고 싶어요. ‘미쓰 홍당무’를 진짜 좋아해서 장면을 따라하고 그랬어요. ‘비밀은 없다’도 좋아했고요. 캐릭터가 정형화되지 않고 자유로워 보여요. 무슨 일을 해도 캐릭터의 성격이 해쳐지지 않고 무슨 일을 할지가 흥미진진하거든요. ‘재꽃’ GV 때 뵌 감독님은 따사롭고 예민하셨고요.”

중학교 1학년 무렵 가족과 함께 전북 무주로 귀농, 고교시절 3년간 연극반 활동을 했음에도 너무 반짝이는 직업 같아서 ‘배우’를 업으로 삼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소녀는 먼 길(대학에서 잠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을 돌아 스크린에 소프트랜딩 했다. 주저함 없이 자신을 투영해버리는 강철과 같은 연기본능에 영화 관계자와 팬들은 현재 열광하고 있다.

 

사진 이완기(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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