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현(37)은 가냘픈 체구지만 당차고 밝은 성격을 지닌 사람이다. 눈을 마주치고 대화만 해도 미소를 띠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스크린 속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강인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진짜’ 배우가 된다.

 

지난 26일 개봉한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에서 이정현은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 여인 오말년 역으로 등장해 당차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선보인다. 워낙 민감하고 아픈 일제강점기 역사를 다루고 있는 영화에서 위안부 캐릭터를 맡아 열연했다. 인터뷰 내내 눈을 마주친 그녀는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서부터 작품에 대한 깊은 고민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Q. 지금 압도적인 인기를 끌고 박스오피스에서 순항하고 있다. 많은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소감이 어떤가?

A. 영화 개봉하고서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었다. 영화를 언론시사회 때 처음 봤는데, 전날 잠도 거의 못 잘 정도였다. 영화를 그렇게나 많이 찍은 (황)정민, (소)지섭 오빠도 모두 눈이 새빨개질 만큼 긴장했더라. 워낙 무거운 주제기 때문에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도 가볍기보단 진지하게 했던 것 같다. 사실 영화도 주변 반응 살피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조금 여유로워 진다면 다음주 중에 찾아 볼 생각이다.

 

Q. 데뷔작인 ‘꽃잎’부터 꾸준히 어려운 역할을 맡아왔다. 더욱이 ‘군함도’에서는 사회적으로 예민한 위안부 캐릭터를 맡아 더욱 신경쓸 부분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A. 말년이가 원래 대본에는 서울 말씨를 쓰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대사들이나 행동이 굉장히 강하다. 그래서 류승완 감독님께 사투리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드렸는데 너무 좋아하셨다. 그런데 사투리가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외국어 배우는 느낌이랄까. 또 워낙 욕도 차지게 못해서 난항을 겪었다. 욕 선생님까지 붙여서 “X발”이란 단어를 한 글자씩 강조하는 포인트로 연습했다.(웃음)

  

Q. 말년이 나오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칠성(소지섭)과 유곽에서 대화하는 신이다. 감정적으로 폭발 할 만한데, 담담하게 내뱉는 말들이 오히려 더 먹먹함을 건네는 느낌이었다.

A. 그 장면이 말년이의 모든 전사와 성격을 설명하는 신이라고 생각한다. 대본을 받았을 때 대사 자체가 너무 잔인하고 고통스러웠다. 처음엔 감정 그대로 슬프게 읽었다. 그런데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할머님이 그 잔인한 일본의 만행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끌려가서 이런 일 당했고, 저런 일도 당했지”하셨다. 그게 더 충격이었다. 그래서 연기도 툭툭 내던지는 느낌으로, 보다 현실감 있는 톤으로 수정했다. 감독님도 감정 호소보단 지금 연기가 더 좋다고 디렉션을 주셨다.

 

Q. 말년이가 엔딩 시퀀스에서 총을 드는 장면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너무 안정된 자세로 총을 쏘는 게 멋지기도 하고, 또 ‘왜 저렇게 잘 쏴?’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A. 총을 잘 쏘는 것에 대해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하시는 것 같다. 영화 초반부에 잠깐 스쳐지나가지만, 당시에는 어린 소녀들도 다 총기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전쟁 중이고 필요하면 누구라도 총을 들고 쏴야하니까 그랬나보다. 그래서 말년이도 총을 쏠 줄 알았다는 설정이다. 고증이 꽤 잘 된 장면이다. 또 조선, 중국 그리고 군함도에까지 여기저기 끌려다니던 말년이가 그렇게 강인한 여성이 된 것도 개인적으론 울컥하는 부분이다.

  

Q. 고증과 현실감을 추구했지만 영화를 관람한 다수의 관객들이 조금 실망스럽다는 평을 남기기도 한다.

A. 아무래도 군함도가 너무 무겁고 중요한 역사이기에 관객 분들의 기대치가 높았던 것 같다. 100% 충족시켜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굉장히 죄송스럽다. 감독님부터 배우들, 스태프들까지 역사를 바탕으로 영화적 재미를 드리는 걸 목표로 삼았었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다보니 역사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그 자리를 대신 채운 액션 장면 같은 여러 영화적 장치들 때문에 다소 실망하시는 것 같다.

 

Q. 언급한대로 ‘군함도’가 귀한 역사를 가지고 너무 상업적 이익을 추구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꽤나 높다.

A. 언급하기 조심스럽지만, 지금 군함도 강제 징용 문제를 두고 일본이 나 몰라라하고, 그런 일 없었다고 시치미 떼는, 화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처음 류승완 감독님이 “이 소재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가미해서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두 이 역사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게 만드는 ‘군함도’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 했다. 주연 조연 단역 할 것 없이 연기를 하면서도 몸에 상처가 나면 ‘잘 연기했다’고 흐뭇해할 정도였다. 해외에서도 개봉을 하니까, 만행을 알리기 위해 모두 최선을 다 했다. 관객분들도 조금은 이런 점을 알아주시고, 실망보단 좋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는 게 마음이 무겁다.

  

Q. 역할을 위해 살을 36kg까지 빼는 등 열심을 다해 찍었는데, 여러 논란들을 보고 있으면 다소 씁쓸할 것 같다.

A. 스스로도 무척 힘들었지만, 모두가 고생했다. 36kg까지 뺀 게 기사화가 많이 됐는데, 사실 ‘군함도’ 현장에선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10kg은 우습고 20kg 넘게 빼신 분들도 수두룩했다. 주연배우들 뿐 아니라 단역배우분들도 역사의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였다. 모든 분들게 고생하셨다는 말씀 전하고 싶다.

 

Q. 그럼 ‘군함도’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느껴졌으면 하는가?

A. ‘군함도’는 물론 허구로 만들어진 이야기고, 더운 날 재미로만 보실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역사를 배경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 꼭 인지해 주셨으면 좋겠다. 탈출하는 장면은 물론 사실이 아니지만, ‘실제로 이랬다면 어땠을까?’라는 소망을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아주 힘들고 고되게 찍었기 때문에 ‘좋은 영화 봤다’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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