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권(46)은 의외의 면모로 똘똘 뭉쳤다. 대중은 '품절남'으로 오해하곤 한다. 정작 싱글남인 그는 "결혼은 자신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닌다. 연기할 때도, 무척 까다로운 편이란다. 아역 배우들을 아이처럼 대하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 본다는 소신이 흥미를 일으킨다.

올 여름 '택시운전사'에 이어 '장산범'(감독 허정)에 출연하며 '섬머 킹' 타이틀을 단 그를 지난 10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드라마, 코미디, 사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온 그는 '장산범'을 통해 처음으로 미스터리 스릴러에 도전한다.

 

 

부산의 민담 설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장산범은 소리를 통해 사람의 기억과 마음을 건드리는 귀신이다. 개개인의 익숙한 소리와 두려운 소리로, 때론 그리운 소리로 사람들의 가장 약한 감정을 건드린다. 독특한 소재를 사용한 창의적인 시나리오는 완성본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더욱 흥미로웠다.

"맨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장산범이 무얼까 상상을 해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검색을 해봤더니, 검색해서 나온 장산범 이미지를 보고선 더 상상이 안됐어요. 현장에 아서야 아, 이렇게 나오는구나 싶었어요. 대본을 읽으면서 사운드나 시각 효과가 들어간 완제품이 과연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어요. 결과적으론, 정말 세련되게 나온 것 같아요. 그동안 상상했던 그림도 잘 나온 것 같고요." 

극중 민호는 딸과 목소리가 똑같은 소녀를 만난 후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의심을 품는 헌신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캐릭터가 평면적이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런 평가엔 개의치 않는 편이다.

"영화의 주된 사건을 끌어가는 인물은 아니에요. 지켜보는 인물이라, 밋밋하고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죠. 민호 캐릭터는 오히려 평면적인 인물이어야 했고, 입체적으로 돋보이면 문제가 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감독님과 수위 조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했고, 제가 하나의 캐릭터로 자리를 잘 잡고 있을 때 아내 역할의 정아 씨 캐릭터가 극대화될 수도 있으니까요. 중심을 잘 잡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데뷔 이래 첫 미스터리 장르에 도전하게 됐지만, 평소에도 '장산범'과 같이 심리적인 공포를 주는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다. 이번 영화를 보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들처럼 긴장감을 주는 영화가 완성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 같은 경우엔 우리 영화와는 전혀 다른 긴장감을 주지만, 그 긴장감이 되게 인상적이었거든요. 주인공이 악당과 만나서 싸우기 직전에 음악이 깔리면서 화면엔 발만 잡혀요. 그 장면을 보고 이래서 타란티노 하는구나 싶었죠. 그런 게 전부 기술 같고 실력 같아요. 그저 피칠갑하고 놀래키는 게 아니라, 그렇게 기술적으로 해야 영화의 가치가 생겨요. 사실 그런 어려운 기술을 쓰는 게 돈 내고 온 관객들에 대한 예의겠죠."

그러면서 "우리 '장산범'도 그런 세련된 기술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은근슬쩍 어필을 해 웃음을 자아낸다. 허정 감독의 연출력이 마음에 들었던 건 남다른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론 '장산범' 역시 북유럽의 느낌을 살린 세련된 영화 같아 흡족스럽다.

"감독님은 만날 때마다 계속 지켜보게 돼요. 얌전하니 말수도 별로 없고, 외모적인 부분도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타입인 것 같고. 그게 신경 쓴 걸 수도 있지만요.(웃음) 아무튼 그런 분인데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이거 어떻게 해야 사람 긴장시키고 놀라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걸 보는 게 되게 웃겨요. 그리고 그걸 꽤 잘하시잖아요. 예술이란 장르에서 '심플 앤 클린'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장산범'이 꼭 그런 영화인 것 같아요."

 

 

1993년 극단 '산울림' 멤버로 데뷔해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연극 ‘서울노트’ 등 대학로 연극배우부터 시작해 어느덧 25년 차를 맞았다. 서울예술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차근차근 커리어를 밟아왔지만 처음부터 연기가 1순위 꿈은 아니었다. 사실 꿈이랄 것도 없었던 그가 극단 생활을 하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20대 초반엔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고, 아르바이트 해서 돈 생기면 놀러 다니고 그러고 살았어요.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스포츠신문에 극단 단원 모집 공고가 떴더라고요.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전화를 했고, 와보래서 가봤더니 독백지를 주면서 읽어보래요. 한글은 읽을 수 있으니까 읽었죠. 내일부터 오라더군요. 특별히 어떤 배우가 되겠다는 다짐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극단 생활을 하면서 선배들 하는 거 보니 점점 욕심이 생겼고, 그래서 학교도 간 것 같아요"

20대 극단 생활을 하던 시절, 처음으로 참석한 회식에선 선배들에게서 몰매를 맞았다. 그 사연이 마치 시트콤 같다.

"한 선배를 볼 때마다 늘 연기가 이질적이고 과장된 것 같단 생각을 했었어요. 회식날 술에 취해서 '왜 연기를 그렇게 하는 거냐'고 질문한 거예요. 꼬부라진 목소리로 '이상하잖아요!' 했더니, 뒤에서 누가 툭툭 쳐요. 따라 나가보니까 윗 기수 선배들이 원을 둥글게 만들어놓곤 저보고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 신나게 몰매 맞았죠(웃음). 근데 그때 했던 생각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예나 지금이나 저는 언제나 자연스러운 연기를 추구했고, 그래서 선배들한테 지적을 많이 받았었죠."

 

 

최근 각광 받는 극단들은 과장되지 않은 생활연기로 점점 바뀌어 나가는 추세다. 개인적으로 '생활연기'라는 단어는 불편하다. 연기에도 이런저런 구분을 지어버리면 자연스럽지 못한 연기 또한 연기로 분류되는 것만 같다. 

"연기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니만큼 가장 사람다워야죠. 물론 연극은 공간적인 제약 때문에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투가 바뀌거나 행동이 과장돼져선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말도 있어요. 코미디는 다른 장르에 비해 30% 정도 과장해야 한다? 전 동의 안 해요. 재미를 위해 행동을 일부러 크게 한다거나 말투에 변화를 주는 건 잘 하는 연기가 아닌 것 같아요. 연기는 '그래, 사람이 저런 상황에 놓이면 저렇게 하지!' 이런 재미가 있어야 연기죠."

최근 2년 6개월 넘게 이어오는 활동, 건강 등 여러 이유가 겹치면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현재는 17일 관객과 만날 '장산범' 홍보 활동에만 전념하는 중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취재하는 지역 신문사의 신념 가득한 최기자 역으로 출연한 '택시운전사'의 천만행 질주에 기쁘기도 하지만, 더 좋아하는 영화는 '장산범'이라며 호쾌하게 웃는다.

"공포만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의외의 드라마를, 무서운 걸 잘 못 보는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긴장감과 의외의 뭉클함을 드리는 영화예요. 여러 가지 요소가 과하지 않게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세련된 영화니까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 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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