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40대 대표 배우 장동건(45)은 유명세에 비해 다작을 한 배우는 아니다. 한동안 지난한 슬럼프를 겪었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예기치 않게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못했다. 그런 그가 2017년 배우로서의 '열일'을 예고하며, 3년만에 스크린 컴백을 이룩한다. '브이아이피'(8월 23일 개봉)로 냉혹하지만 뜨거운 남자들의 세계의 포문을 여는 장동건을 18일, 영화처럼 서늘하고 흐린 날씨의 삼청동에서 만났다.

 

‘브이아이피’는 국정원과 CIA의 기획으로 북에서 온 VIP 김광일(이종석)이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고, 이를 은폐하려는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 반드시 잡으려는 형사 채이도(김명민), 복수하려는 북한 보안성 리대범(박희순) 등 한 번의 선택으로 운명이 엇갈린 네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신세계'로 느와르 장르를 정평한 박훈정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시사회를 통해 마주한 결과물은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시나리오보다 나았던 것 같아요. 완성본과 시나리오는 어떻게 다를까 궁금했는데 연결이 잘 된 것 같고 만족스러워요. 희한하게 아쉬운 장면은 없어요. 그만큼 감독님의 정확한 계산이 작용됐고, 불필요한 장면 역시 거의 없이 깔끔하더라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악마를 보았다'와 '신세계'의 중간 지점 같다고 느껴졌어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가장 끌린 요소는 바로 현실성이었다. 어디선가 진짜로 일어날 법한 이야기와 캐릭터가 내재하고 있는 인간성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국정원 요원 박재혁은 첩보원이나 액션보단 사무적인 면을 더욱 강조했고, 인간의 복합성을 드러내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변화하는 인물이죠. 배우로서도 두가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현실적이고, 정의감이 없진 않으나 우선적으로 회사 업무에 충실하는 모습 등이 인상적이더라구요. 저는 조직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부여하기 위해 박재혁은 가정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다만 이 인물이 느끼는 심경의 변화를 드러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감독님과 많의 의논했죠. 결론은 절제하는 쪽을 선택했어요. 그래야 뒷부분 반전이 잘 살고 지루한 요소도 배제되지 않을까 싶었죠."

 

'브이아이피'는 올해 개봉작 중 가장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한다. 영화 내내 험악하게 대거리하는 상대 역 김명민과는 이번 영화를 통해 친해질 수 있었고, 영화의 타이틀롤이자 악인 김광일 역의 후배 이종석은 치열했던 옛 생각을 많이 나게 해줬다.

"명민씨랑은 촬영 들어가기 전에 배우들하고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처음 뵀는데, 굉장히 활달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못 견디는 분이더라구요. 현장에서도 수월하게 촬영할 수 있도록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담당하셨어요. 종석씨는 스스로 변화 욕구와 갈증이 있는 것 같았어요. 현장에서 자신의 단점을 내려놓으며 '도와주세요'라는 자세로 임하더라구요. 저도 '해안선'이란 영화를 찍을 때 비슷한 심정을 느낀 적 있어서 응원해주고 싶었어요."

이제까지 다양한 국적의 외국 배우들과 합을 맞춰봤지만, 할리우드에서 건너온 피터 스토메어는 가장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 분 작품들을 보면 항상 세고 무서운 역할을 많이 하셔서 걱정이 들었어요. 현장에서 좀 깝깝한거 아닐까 싶었거든요. 나중에 영화 후반부에선 그분과 기싸움도 해야하고 부딪히는 장면이 많으니까… 근데 처음 만날 때, 그분이 키티 가방을 메고 오셨더라구요(웃음). 그때 마음이 확 놓였어요. 실제 성격도 되게 푸근하세요. 서로 편하게, 좋은 감정에서 촬영할 수 있었어요."

 

최근 아들에게 아내인 고소영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 '연풍연가'를 보여줬다. 아들은 화면 속 엄마 아빠의 모습에 오글거린다며 부끄러워했지만, 출연작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나니 아버지로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점도 있었다.

"아이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영화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나온 영화는 아이들에게 보여줄만 한 영화는 없는 것 같아요. 밝은 스토리, 근사한 멜로 같은 것들요. 그러고 보니 한국 영화는 최근 부상한 멜로 영화가 잘 없어요. 하나가 유행하면, 그것만 주구장창 따르는 획일성이 있거든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장르가 훨씬 다양했는데, 그래서 아쉬움이 남아요."

영화 시장이 획일적으로 변했다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론 느와르가 끌린다. 보는 것도 좋아하고, 계속 도전해보고 싶다. 과거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게 생겨날 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장르가 바로 느와르였기 때문일까.

"제 또래들에게 인생 영화 한번 말해보라고 하면 '대부'를 언급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나 '스카페이스' 이런 영화 좋아하거든요. 홍콩 느와르 영화 좋아하던 전형적인 세대이기도 하고요. 느와르는 유행을 좇는 장르라기보단 아주 옛날부터 클래식한 장르처럼 느껴져요. 분명 그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이 우울한 노래를 듣는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와 이야기로부터 비롯된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 같아요."

 

 

어느덧 40대의 배우가 됐다. 누군가는 40대가 되고서 오히려 고민이 많아진다고 하나, 열정과 에너지로 충만했던 20, 30대 시절에 비해 배우로서의 마음가짐은 한결 편해진 느낌이다. 

"여유로워졌어요. 오히려 지금보다 어렸을 때 더 책임감이 지나칠 정도로 많았던 것 같아요. 20대, 30대 초중반에는 40대 중반의 제가 잘 상상이 안 갔어요. 제 주변 40대 선배들 보면 아저씨 같고 그랬는데, 지금 후배들이 저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겠죠. 이정재, 정우성, 이병헌 등 저랑 비슷하게 데뷔한 동료 배우들이 영화시장에서 활약하고 할리우드 진출하는 모습같은 걸 보면서 부담감이 오히려 덜어진 것 같아요. 한차례 슬럼프를 거치고 나니까 더 단단해진 것도 같고, 스스로 훨씬 편안해진 느낌이에요."

슬럼프는 다행히 고요하게 지나갔다. 슬럼프 이후 처음으로 촬영한 영화 '브이아이피'를 통해 다시금 연기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물론 '브이아이피'는 그런 면에서 의미 깊은 영화지만, 다른 작품들도 개인적인 의미가 저마다 있기 마련이다. 얼마 전 출연했던 박중훈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생경한 기분을 경험했다.

"라디오 현장에서 모니터에 댓글 달리는 게 보이더라구요. 그걸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댓글엔 '마지막 승부' 얘기도 있고, '태극기 휘날리며'나 '신사의 품격' '우는 남자'도 언급해주셨는데 그 작품들마다 시간 차이가 꽤 돼요. 내가 의도했건 안했건간에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겠구나 싶더라고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평가가 다양하다는 걸 알고서 느낌이 새로웠고, 앞으로도 많은 작품을 하고 싶어졌어요."

 

2017년은 기분 좋은 한 해가 아닐 수 없다. 아내인 고소영은 최근 10년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해 시청자들의 호평을 얻었다. 장동건 역시 올해에만 두 편의 영화가 개봉을 대기 중이고, 9월엔 후배 배우 현빈과 새 영화 '창궐' 촬영을 앞두고 있다. 

"고소영씨는 무엇보다 본인이 일을 즐겁게 했어요. 10년만에 나오면서 중압감을 분명 느꼈을텐데 본인이 좋아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저도 한 작품 하고나서 다음 작품은 쉽더라고요. 제가 관객들과 만나는 건 '우는 남자' 이후로 3년만이긴 한데, 그 3년 동안 저는 계속 '7년의 밤' 촬영을 이어왔거든요. 류승룡씨가 죽인 소녀의 아버지 역할을 맡았고, 아마 올해 안에 스크린에서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만간 촬영을 앞둔 '창궐'에선 악랄한 악인 역할로 출연할 예정이니 기대해주세요." 

 

사진 = 호호호비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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