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원소’ ‘루시’ 등 발표하는 영화마다 시네필의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 뤽 베송 감독이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로 돌아온다. 자신만의 스타일리쉬한 연출력과 깜짝 놀랄만한 비주얼로 다시 한 번 영화팬들을 경이로운 스크린 세계로 안내할 준비를 마쳤다.

오랜 시간 스크린에 다양한 세계를 그려온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이하 ‘발레리안’)는 가장 거대하고 흥미롭다. 프랑스의 유명 그래픽노블 ‘발레리안과 로렐린’의 세계관을 스크린에 옮겨, 전 우주 3236개의 종족, 3000만명이 모여 사는 ‘천 개 행성의 도시’ 알파 스테이션을 창조해냈다. 뤽 베송의 과거 작품들만큼의 새로움은 없지만,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재미로 가득하다.

에이전트 발레리안(데인 드한)과 로렐린(카라 델러비인)은 30년 전 사라진 행성 뮐의 마지막 남은 컨버터를 되찾아 오라는 미션을 받는다. 가까스로 컨버터를 구출해 낸 그들은 본거지 알파로 향하고, 제한된 시간 안에 알파 내부의 위험요소를 제거해야 하는 새 임무를 받는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이 자신들이 구출한 컨버터와 연계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는다.

‘발레리안’은 아직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먼 미래인 28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만큼 영화엔 상상력이 넘친다. 우주를 유영하는 거대한 인공 행성, 수천 종의 외계인들이 한데 어울리고 고도로 발전된 과학기술이 등장한다. 또한 이 상상력에 21세기에 만연한 여러 문제들까지 차분히 엮어내 보다 입체적이고 흥미진진한 영화로 만든다. 중심 서사로 작동하는 외계종족 간의 차별과 다툼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이나 국가 분쟁 등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 알파 스테이션은 언뜻 파라다이스처럼 보인다. 수많은 종족이 화합하고 함께 발전해 나가는 모습은 우리가 바라는 이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알파를 망가뜨리는 것 역시 어떤 외부적 문제가 아니라 이상처럼 보였던 곳 내부에 농익어 터져버린 문제다. 인간에 의해 급작스런 파멸에 이르렀던 종족 진주족의 사연이 모든 문제의 원인임이 밝혀진다. 그래서인지 알파 스테이션 속 인물들은 시종일관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들 스스로 죄의식의 발로인지, ‘감히 멸망한 종족 따위의 도전’이 불쾌한 까닭인지는 명확하진 않다.

이렇듯 복잡한 문제들이 무겁게 얽혀 있지만, 정작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히어로’ 발레리안과 로렐린, 두 에이전트 파트너는 사건을 인상 쓰고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가볍고 경쾌한 리듬으로 얽힌 문제들을 풀어내려 시도한다. 두 캐릭터 사이에 얽힌 애정과 액션 신에서의 코믹한 호흡은 영화 전체를 유쾌하게 이끄는 동력이 된다.

발레리안과 로렐린의 유쾌함은 막역한 조증이 아니라 따스한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한다. 인간에 의해 파멸을 맞게 된 진주족의 사연에 안쓰러움을 내비치는 그들의 마음씨는 과거 미국인-인디언의 다툼부터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투쟁과 오버랩된다. 두 주인공의 행보는 이익과 승리에 집착하는 인간 욕망에 대한 비판의식을 전하면서, ‘교감’과 ‘공감’이라는 미덕의 가치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최근 다수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는 주인공에게 쉬이 막중한 짐을 지우곤 했다. 가깝게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나 ‘옥자’ ‘스파이더맨: 홈커밍’ 등에서 주인공들은 표면적 갈등과 투쟁을 해결해야 하는 임무 외에도 내면에선 자신의 신념 혹은 자부심, 도리에 대한 시험을 치른다. 이는 분명 강점이 있는 서사 구성이다. 캐릭터에게 입체적 매력을 부여하고, 외부 갈등, 내부의 딜레마를 함께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강한 흥미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발레리안’에서는 이 짐을 과감히 치운다. 복잡한 서사 구조의 흥미 대신, SF블록버스터만의 장르적 쾌감을 끌어올린다. 오직 외부 갈등,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주인공의 전력질주는 영화의 속도감을 극대화 시킨다.

물론 이는 양날의 검이다. 간혹 서사가 다소 유치해지는 감이 있고, 내밀한 고민을 통한 셔레이드나 비주얼 스토리텔링 보단 빠르고 긴 호흡의 대사처리로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은 일면 게을러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히 지루함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발레리안 보다도 로렐린이다. 흔히 남녀 콤비 무비의 경우, 일반적으로 여성 캐릭터는 방해꾼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뻑하면 납치나 부상, 실종 되면서 과감한 결단을 앞둔 남성을 멀리 돌아가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발레리안’ 속 로렐린은 기존 숱한 영화의 ‘발암’ 여성 캐릭터와는 정반대다. 오히려 위기에 빠진 발레리안을 구하기 위해 먼저 행동에 나서고, 한 박자 빠른 결단력으로 전력질주에 동참, 장르적 쾌감을 배가한다. 과거 ‘레옹’ ‘니키타’ ‘제5원소’ 등에서 걸크러시 캐릭터를 만들어왔던 뤽 베송 감독의 취향이 엿보인다.

 

 

사진='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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