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훈(48) 감독, 1998년 ‘벌이 날다’로 그리스 테살로니키영화제 은상, 이탈리아 토리노영화제 대상·비평가상·관객상을 휩쓸며 세계 영화계에 핫샷 데뷔한 그는 이후 20년 동안 한국 다양성영화의 지평을 확장하는 외길을 걸어왔다.

 

 

그의 단편영화 ‘설계자’가 제17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17~25일·종로 인디스페이스) 개막작으로 선정됐고, 클래식 한류 대표주자인 피아니스트 김선욱을 주인공으로 한 음악영화 ‘황제’의 가을 공개를 앞두고 있다. 인터뷰 시간 내내 민감한 키워드들이 쉼표 없이 이어졌다.

 

# 설계자

국내 유일의 영화와 전시를 아우르는 뉴미디어 아트 대안영화제인 ‘네마프’에는 올해 20개국 120여 명의 영화감독, 미디어아트 작가 등이 참여했다. 20분 분량의 ‘설계자’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촬영된 작품으로 어린 시절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한 영화감독의 고민을 통해 창작자가 지닌 무게에 대한 회고와 철학적 사유를 다루고 있다.

“영화전문가들은 내 특유의 시적이거나 정적인 부분보다는 무겁지 않고 캐리터와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라. 이국적 풍광에 너무 쫓기지 않고, 주인공의 절제된 내레이션을 통해 그가 처한 상황, 감독으로서의 고뇌를 좇아갈 수 있어서 좋았다는 평을 해줬다. 일반 관객들은 슬픈 정서가 느껴지고 멜로 느낌이 있는, 절로 힐링되는 영화로 받아들여주는 것 같았다.”

‘설계자’는 한국 단편영화들이 추구하는 ‘센’ 표현과 메시지 전달의 틀을 뛰어넘는다. 인상적인 음악과 풍경이 쭉 이어진다. 느릿느릿 쉬어가듯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아스라한 느낌이 밀려든다. 편안한 관람이 이뤄진다.

 

 

“난 ‘영화를 찍어야지’ 하고 시작하지 않는다. 자본의 논리와 시나리오에 묶여있으면 그것 자체가 속박이 되고 불행이 시작된다. 영화는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로움은 일상을 영화로 찍어야 가능해진다. 그래서 프리 프로덕션, 진행 중인 프로덕션, 후반 작업 중인 포스트 프로덕션이 항상 동시에 이뤄진다. 지금도 각각 2편씩, 6편을 동시 진행 중이다.”

지난해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으로 마르세유에서 그의 영화 5편이 초청 받았다. 감독과의 대화 때문에 현지에 가게 됐을 때 ‘죽은’ 영화들을 가지고 논하느니 이 기회를 활용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싶어 미리 시나리오를 구상해 1주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 시나리오·촬영·연출을 맡고 조연출과 주연을 맡은 연출부 소속 배우지망생 변재욱까지 3명이 참여했다.

“인간은 이미 설계된 존재가 아닐까. 하느님이 다 다르게 설계를 했을 거고, 각자의 쓰임새가 있을 거다. 이런 종합적인 이야기를 나를 이입한 새로운 형태의 감독을 통해 해보고 싶었다. 여행길의 막달라 마리아 동굴에서 맞닥뜨린 사건에 이어 주인공에게 사랑의 생명력을 심어주면 온전한 형태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 김선욱 그리고 ‘황제’

수년 전 배급문제로 심신이 지쳤을 때 클래식 콘서트를 갔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지휘자 정명훈과 협연하는 연주회였다. 그때 흘렀던 곡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였고, 깊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에 자리에 앉아 있다가 친구사이인 두 중년 여인의 해후를 목격했다. 미국에 유학 중이던 고2 자식이 자살한 엄마와 세월호 엄마는 우연히 그곳에서 마주쳐 이야기를 나누다 부둥켜 울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음악이 얼마나 치유를 주는지, 예술의 힘을 절로 느꼈다. 우리는 재미와 표현의 수위로만 평가하지, 영화를 통해 치유를 주느냐 여부는 뒷전이었다. 아픈 사람들을 보듬어주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더욱이 국내 클래식 음악영화가 별반 없는 것도 도전욕구를 자극했다.”

김선욱을 주인공으로 한 극영화 ‘황제’는 이렇게 출발했다. ‘황제’ 1, 2, 3악장 재해석하면서 시나리오을 집필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 한 해 1만5000명이 자살하는 현실은 전쟁 상황과 동일하다. ‘황제’는 집단자살을 하려는 청춘들이 내면의 세계로 빠져들어 김선욱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의식이 깨어난다는 줄거리다. 음악을 통해 삶을 복원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힘든, 분노가 있는, 삶이 무료한 사람들에게 힐링이 되는 작품이 되기를 소망했다.

김선욱과 연락이 닿아 설득하자 신중하게 “하겠다”는 대답을 내놨다. 지난 2015년 6월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크랭크인해 1년6개월 동안 촬영을 진행했다. 절반은 그가 체류 중인 영국 런던을 베이스로 유럽, 절반은 한국에서 이뤄졌다. 영화에는 김선욱이 헝가리 부다페스트 콘서트홀부터 국내 숲과 폐허 등에서 연주한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등 11곡이 삽입됐다.

“선욱씨가 연주뿐만 아니라 연기도 했고 잘했다. 평소 영화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더라. 어떤 작품으로 나올지 흥미로워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애어른’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는 선욱씨의 깊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 스태프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 일상을 대하는 태도를 존중하고 존경한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음악계에 대해 소신이 뚜렷하다.”

 

# 군함도

지난달 ‘군함도’ 개봉 당시 자신의 SNS를 통해 “2168. 독과점을 넘어 이건 광기다. 상생은 기대도 안한다. 일말의 양심은 있어야 한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고 일갈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총을 겨눈 대상은 ‘군함도’나 대자본 영화가 아니라 국가였다. 독과점이 이토록 무섭게 치닫는데 왜 방기하느냐, 교통정리를 해달란 거였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스크린 독과점에 대해 과도하다고 느끼지 않나. 그러면 일단 규제 스티커를 발부해야 한다. 세월호가 되기 전에 사이렌을 울리고, 침몰 전에 대피시켜야 한다. 그런데 국가는 이 광기에 대해서 영화업자들끼리 조율하라 한다. 하지만 배급업자, 대기업, 일부 영화인들은 오랫동안 카르텔을 맺어왔기에 욕심을 멈출 수가 없다.”

그는 하루 만에 90만명이 한 영화에 몰리는 현실이 “너무 공포스럽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가 안 그러는데 대한민국만 ‘규제법’이 없어서 상생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다. 천만영화 탄생을 질투하거나 반대하는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작동시키는 걸 반대한다고 거듭 강변한다.

“하루 상영 시 한 영화가 스크린의 20프로 이상을 가져가지 못하게 조율하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중소규모 영화를 걸어준다고 하면서 새벽, 심야에만 상영해 실질적으로 관객을 원천봉쇄하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거다. 작업이 들어간 게 아니라 공정한 룰에 입각해서 하자는 거다. 한국영화가 침몰하고 있는데 왜 호루라기를 안 부나. 그러는 사이 영화인들의 불행은 커졌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졌고 불신은 너무 커졌다. 영화의 다양함도 없어졌고, 정말 좋은 영화가 없어져버렸다. 만드는 사람들이 없어졌으니.”

 

사진= 민병훈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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