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섭(28, 백수 겸 웹매거진 '움' 운영)

 

1. 싱글’s 10pick

백수로 지내는 어느 날, 친한 동생에게 카톡이 하나 왔다. 내 인생의 10가지 키워드를 선정해달란다. 이름하야 ‘싱글’s 10pick’. 음악 하는 사람, 미술 하는 사람, 배우 등 여러 멋진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뭣도 없는 좆밥청춘인 나도 이렇게 멋진 사람들과 같은 제안을 받은 것이다. 갑작스런 일상의 특별함에 키워드 10가지 중 첫 번째는 벌써 찾았다.

 

2. 공원 벤치

어디에나 보물처럼 숨어있는 조용한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동네 작은 공원 속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눕는다. 누워서 기지개를 크게 켠다. 길지 않은 다리를 최대한 쭉 편다. 흐아아암, 하품을 아주 크게 한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 세상 팔자 이렇게 좋을 수 없다. 이 순간만큼은 잠시 내 처지를 잊고 힘을 얻는다.

 

3. 초콜릿

공원에 오기 전에 편의점에서 샀던 초콜릿을 꺼낸다. 힘이 없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입 안에 초콜릿을 넣고 부드럽게 녹여 먹는다. 먼 과거에 처음으로 카카오 열매를 볶아 차로 끓여 마셨던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원주민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초콜릿을 사랑한다. 이 세상에 초콜릿보다 맛있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4. 반바지

4월이 되어 추운 계절이 끝나고 드디어 반바지를 입는 시기가 도래했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종아리를 스치고 사타구니까지 들어온다. 마치 더운 여름에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는 것처럼 상쾌하다. 그리고 움직임이 자유롭다. 무릎발사를 걱정하지 않고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인다. 어디로든 뛰어가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생긴다.

 

5. 음악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마음을 흔드는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그 음악이 빠른 템포의 신나는 음악이든 느린 템포의 우울한 음악이든 그건 상관 없다. 노래를 따라 부르면 기분이 더 좋다. 누웠던 몸을 반쯤 일으켜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살핀다. 형편없는 노래실력을 누군가 들으면 창피하니까. 다행히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마음 놓고 노래를 부른다. 다음 곡은 John Lennon의 Imagine.

 

6. 망상

내가 누워있는 벤치가 갑자기 들썩거리더니 하늘 높이 떠오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당황스럽다. 우선 납작 엎드리고 양 손으로 벤치를 꼭 붙잡는다. 밑을 바라보니 온 세상이 새파랗다. 아마 태평양 위를 날고 있는 것 같다. 한참을 날던 벤치는 남태평양의 작은 무인도 야자수 그늘 아래로 착륙한다. 새파란 바다와 깨끗한 해변, 그리고 손닿는 곳에 널려있는 열대과일. 이곳에서 난 아무 것도 안 할 거다. 이미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더욱 아무 것도 안 할 거다. 이런 망상은 정말 재미있다. 물론 아주 잠깐의 현실도피일 뿐, 현실을 다시 직시했을 때 괴로울 테다. 하지만 현실이 너무 힘들 땐 이런 망상도 힘이 된다.

 

7. 친구의 연락

망상을 깨는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이상하다, 나한테 연락을 할 사람이 없는데. 이제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쩌다가 울리는 진동에도 설레지 않는다. 어차피 광고나 휴대폰요금 미납안내 메시지를 보고 기분만 망치게 될 테니. 그런데 화면을 확인해보니 친구의 이름. 날 생각하고 연락을 해주는 모든 사람들의 존재가 힘이 된다. 물론 애인이라면 가장 큰 힘이 될 것 같지만 그런 연락이 당분간 올 일은 없을 거 같다…

 

8. 알바 급여

전화기를 꺼내 ARS서비스로 계좌 잔액을 확인해본다. 떨린다. 몇 단계를 거쳐 드디어 잔액을 알려주는 음성이 흘러나오고 긴장의 떨림은 기쁨의 떨림으로 바뀐다. 알바 급여가 들어왔다. 이제 통신비와 교통비 미납금을 낼 수 있다. 구멍이 뚫린 낡은 신발을 대체할 새 신발도 사러 가야겠다. 그리고 친구와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도 해야겠다. 자본주의 강점기를 살아가는 프롤레타리아 노예에게 가장 힘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돈인걸까?

 

9. 편의점 테이블에서 마시는 맥주

친구와 순대국밥에 소주를 한 잔 하고 편의점으로 향한다. 긴 고민 끝에 원플러스원 행사중인 과자와 캔맥주 두 개를 집어든다. 술집보다 비용은 적게 들지만 상쾌한 야외에서 맥주를 마시며 내일을 살아갈 더 큰 힘을 얻는다. 경영학에서 좋아하는 효율성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노동력으로만 평가할 때가 아니라 이럴 때 필요한 것 같다.

 

10. 잠

어두운 방 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켠다. 오늘도 살아냈다. 아침에 100퍼센트로 충전되었던 에너지는 빨간불이 되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신기하게도 백수생활을 해도 에너지는 소비된다. 오늘은 더 이상 뭘 할 힘이 없다. 다시 충전하려면 불을 끄고 눈을 감아야 한다. 어차피 많은 시간 잘 수도 없다. 오랜 시간 편히 잘 수 있는 여유도 빼앗긴 삶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달콤한 잠으로 힘을 얻고 그 힘으로 내일을 또 살아간다.

 

 

사진: www.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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