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영화감독 이창동이 2010년 ‘시’ 이후 오랜만에 메가폰을 든다. 신작 ‘버닝’(가제)에 배우 유아인이 이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캐스팅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화 팬들의 기대감을 자극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언제나 인간 본질을 탐구하며 소외된 이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어왔다. 그의 세계에서 배우들은 최고의 연기를 펼쳤고,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강하게 빛냈다. 이제 유아인이 이어받게 된 이창동 페르소나의 역사를 되짚어봤다.

  
 

‣ 한석규 - ‘초록물고기’

이창동은 1997년 ‘초록물고기’를 통해 영화감독에 데뷔했다. 당시 한참 신도시가 건설되던 일산신도시를 주무대로 암흑가의 부조리, 허무함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 청년의 비극적인 삶을 리얼하게 그려내며, 그해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녀주연상 등 다섯 개 부문을 독식했다.

탄탄한 스토리에 힘을 더한 건 주인공 막동 역의 한석규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살기 위해 조직폭력배가 되는 캐릭터로 청춘의 고뇌와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랑, 핏빛 어린 누아르를 유려하게 넘나들며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 살인을 저지르고 공중전화 안에서 “큰성? 나야 막동이... 전화 끊지마”라는 장면에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연기를 선보였다.

  

‣ 설경구 - ‘박하사탕’ ‘오아시스’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는 최고의 영화로 꼽힌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공수부대원의 망가진 삶을 독특한 시간 구성 방식으로 조명한 ‘박하사탕’과 사회 부적응자 남자와 지체장애인의 사랑을 아름다운 멜로드라마 문법으로 그린 ‘오아시스’의 가장 큰 복은 설경구라는 배우를 배출한 데 있다.

설경구는 싱글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인생에서 한 작품만 고르라고 하면 앞으로도 계속 ‘박하사탕’이다”라며 작품에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영화 자체가 가진 마이너한 색채도 인상적이지만, 설경구 특유의 선 굵은 연기가 얹혀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관객들의 가슴에 짙은 발자국을 남겼다.

  

‣ 문소리 - ‘박하사탕’ ‘오아시스’

배우 문소리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 영호(설경구)의 첫사랑 순임 역으로 등장해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이후 ‘오아시스’에선 지체장애인 공주 역을 맡아 설경구와 또 한 번 호흡을 맞췄다. 편견과 가식에 찬 세상에 작은 비판을 던지는 영화에 꼭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이며 눈길을 끌었다.

설경구의 열연도 놀라웠지만, 특히 문소리의 열연에 평단과 대중은 박수를 보냈다. 네티즌의 영화평을 보면 “문소리의 뇌성마비 연기는 어떠한 특수분장, 특수효과보다도 위대했다”(네이버 영화 toto****), “나 어릴때 이 영화 보고.. 문소리가 진짜 지체장애가 있는줄 알았다”(dir_****)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그의 연기를 바탕으로 ‘오아시스’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여우상을 수상, 대한민국 영화로는 세계 3대 영화제 최초 2개 부분 석권의 기록을 세웠다.

  

‣ 전도연 - ‘밀양’

이창동 감독은 배우의 능력치를 최고로 끌어내는 데 특화된 감독이다. 그 능력은 앞선 ‘박하사탕’ ‘오아시스’에서도 잘 드러났지만, 2007년 작 ‘밀양’에서 정점을 찍었다.

‘밀양’은 미망인 신애(전도연)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려다 좌절하는 과정을 소묘한다. 전도연은 종교의 맹점과 인간의 오해를 소재로 한 민감한 작품에서 고뇌하는 캐릭터를 유려하게 소화해 세계적인 호평을 한몸에 받았다. 특히 희망과 좌절, 용서와 배신감 등 폭 넓은 감정을 널뛰었다는 평을 받으며 당시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윤정희 - ‘시’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시’ 역시 쉽지 않은 작품이다. 외손자와 단 둘이 살고 있는 60대 여인 미자가 알츠하이머 진단, 경제적 어려움, 손자의 비행 등 힘겨운 삶을 사는 가운데, 동네 문화센터의 시 창작 강좌에 등록을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그린다.

‘시’의 주연은 1970년대를 풍미한 배우 윤정희가 맡았다. 1994년 ‘만무방’ 이후 꼬박 16년 만에 영화에 출연했지만 녹슬지 않은 연기력으로 국내외 영화제의 상을 휩쓸었다. 영화 속 미자의 소녀 같은 면모는 물론, 할머니로서의 책임감까지 40년 이상의 연기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평을 받았다. ‘음담패설’이 넘치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시’를 찾는 순수함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 유아인 - ‘버닝’

최근 몇 년 동안 드라마 ‘밀회’, 영화 ‘사도’ ‘베테랑’ 등에서 물오른 연기력을 과시한 배우 유아인이 새로운 이창동 감독의 페르소나로 낙점됐다. 신작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기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 온 세 젊은이 종수, 벤, 해미의 만남과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다.

유아인은 사랑하는 여자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순수하고도 예민한 남자, 주인공 종수 역으로 극을 이끌어 나갈 예정이다. 이창동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스토리와 리얼리즘 연출, 묵직한 메시지에 유아인 특유의 생기 넘치는 연기가 가미돼 기대를 불러 일으킨다.

평소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제목소리를 내온 유아인은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가진 메시지에 깊이 공감했고, 제작 여부가 미궁에 빠졌던 상황에서도 '버닝'을 기다리며 이창동 감독과 뜻을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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