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주 간격으로 종영한 월화드라마 ‘청춘기록’(tvN)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SBS)는 20대 청춘의 꿈과 사랑, 성장담을 다뤘다. 흥미로운 대목은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해 슈퍼스타가 된 두 남자주인공의 연인을 향한 단골 멘트가 똑 닮았다는 점이다. “미안해(요)”. 이 말의 '오남용'으로 결국 여친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이별 통보를 받았다.

드라마 '청춘기록' 박보검(왼쪽)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김민재

‘청춘기록’의 사혜준(박보검)은 모델에서 배우로 전업해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따뜻하면서 머리 좋고 공감능력도 뛰어나다. 좋고 싫은 게 확실해 무시로 돌직구를 날린다. 긍정적이며 자립심 강한 메이크업 아티스트 안정하(박소담)와 만나 사랑을 키워간다.

혜준이 인기를 얻고 지나치게 바빠진 후부터 상황들이 자꾸 꼬여만 간다. 사실무근의 악성 스캔들과 기사들이 퍼져나가고 혜준은 이런 것들로 정하가 상처를 받을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정하에게 그런 상황을 털어놓기보다 “미안해”라고 말한다.

마침내 정하는 혜준에게 "헤어지자"며 "사랑하면 미안하단 말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말 기억해? 나 만나면서 미안하다고 몇 번 말한 줄 알아? 그 말 할 때마다 난 왜 니가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지 모르겠어. 니 감정까지 고스란히 내가 받는 거 이제 안 할래"라고 말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박준영(김민재)는 쇼팽 국제콩쿠르 ‘1위 없는 2위’를 수상한 뒤 7년 동안 해외 연주활동을 벌이다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월드클래스 피아니스트다. 욕망을 누르고 비워내는데 익숙하며 타인을 배려하느라 늘 자신을 후순위에 두던 그가 처음으로 한 여자에게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여리여리한 모습과 달리 단단한 내면을 지닌 바이올린 전공 음대생 채송아(박은빈)다.

가장 많이 등장한 준영의 대사가 “송아씨”와 “미안해요”다란 말이 나올 만큼 사과의 연속이었다. 복잡한 집안일로, 부채감의 대상이자 정인이었던 정경(박지현) 일로 답문자를 못 보내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습관처럼 튀어나왔다. 이에 “미안하단 말이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속상하다, 힘들다, 울고 싶다, 그런 얘길 할 수 있는 그런 친구를 하고 싶었다”란 송아의 내레이션이 흘렀다.

이후에도 밤늦은 시간에 전 연인이 집에 찾아온 것을 묻는 상황에서 준영은 “미안해요”라고 대답한다. 이에 송아가 “왜 자꾸 미안하다고 하는 건대요. 왜 미안할 일을 계속해요?”라고 화를 내곤 떠나자 뒤쫓아와선 다시금 “미안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라고 말한다. 이런 준영을 바라보는 송아의 표정 아랜 원망과 불신이 들끓고 있었다. 다음 만남에서 송아는 “당신을 사랑하는 게 힘들고 행복하지 않다”며 이별 선언을 했다.

반듯한 두 남자의 “미안해(요)”란 말에 아이러니하게도 두 여자는 이별을 결심했다. '미안해'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쳤을 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말이다. 좀 더 가볍게는 일상에서 “실례합니다(Excuse Me)”와 같은 의미로 빈번하게 쓰인다. 타인을 배려하거나 이해를 구할 때, 본의 아니게 실례할 것 같은 상황에서 윤활유처럼 쓰이는 말이다.

문제는 남녀관계에서 습관적으로 “미안해”가 사용될 때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진=tvN '청춘기록' 박보검과 박소담

혜준이나 준영 모두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자꾸만 여자친구에게 “미안해(요)”라고 말한다. 전후 사정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의논하며 서로 이해의 과정을 밟아나가는 대신 “미안하다”라고만 말했을 때 듣는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상대방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게 아닐까란 의심이다(보통은 '미안해'라고 말하면 더이상 어쩌지 못하고 상황 종료되는 게 대부분이니). 또 하나는 나를 신뢰하지 못해서 제대로 말을 안하는 건가란 서운함이다.

반듯하고 예의 바른, 이상적인 남성상에 가까운 혜준과 준영은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 입지 않기를, 힘들기를 원치 않는 배려심에 자신의 복잡한 속사정이나 버거움을 털어놓지 못한 채 “미안해”란 말만 반복했다. 본질을 더 캐고 들어가 보면 상대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겠다는 심리다. 부모가 금쪽같은 자식에게 “엄마(아빠)가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가부장제 영향력이 강하던 과거 같으면 이런 말이 남자다움으로 미화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21세기 양성평등의 시대다. 남녀관계에서 여자는 남자의 일방적인 보호 대상이 아니다. 쫓아다니며 보호해줄 수도 없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은 사고방식이다. 남자건 여자건 각자의 일터에서, 학교에서, 수많은 관계 속에서 무수히 상처 입고 스스로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존재들이다.

사진=SBS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김민재와 박은빈

정하와 송아는 자존감이 강한 독립적인 여성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남자친구가 설령 자신의 약하거나 못난 모습을 내비치더라도 솔직하게 이야기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의지할 때 사랑하는 관계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혜준-정하는 결국 이별이란 새드엔딩을 맞았다. 반면 준영-송아는 재결합의 해피엔딩을 만들었다. 혹독한 고통이 수반됐으나 준영이 과거와 달리 무엇이 힘들었는지 구체적인 고백과 음악을 통한 마음의 헌정을 해냈기 때문이다. 너무나 쉽사리 사용되는 “미안해”, 그 말이 얼마나 큰 무게감 혹은 위험성을 지녔는지 팝스타 엘튼 존은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1976)란 노래를 통해 일찌감치 설파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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