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부자들’(2015)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탱하는 정치권-검찰-언론-조폭이란 내부자들의 음습한 카르텔을 소름 끼치게 묘사해 기대 이상의 흥행력을 보였다. 역시나 영화적 상상력은 현실 속 드라마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다.

 

 

박근혜 정권 시절 작동된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폭로됐을 때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일이 있을까,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어리석었다. 뿌리는 깊고도 단단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연예인 블랙리스트’가 다시금 세상의 빛을 봤다.

박근혜 블랙리스트의 기획·연출자가 청와대였다면, 이명박 블랙리스트에선 국가정보원이 집행자로 나섰다. 이들은 ‘좌파 연예인 대응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문화·예술인들을 깎아내리기 위해 82명의 명단을 만든 뒤, 이들을 출연하던 방송에서 퇴출시키는데 온갖 공작을 일삼았다. 사회적 발언을 하는 걸 막기 위해 조언을 가장한 협박을 하기도 했다. 관록의 배우 문성근은 무려 8년 동안 드라마 출연 기회를 박탈당했고, 방송인 김미화 김제동은 프로그램에서 느닷없이 강퇴 당했다.

심지어 국정원 심리전단은 2011년 민간인외곽팀과 공조해 소셜테이너 문성근 김여진의 나체 합성사진을 만들어 인터넷상에 유포시켰다. 사진 아래에는 “공화국 인민배우 문성근·김여진 주연” “육체관계”라는 문구를 다는 등 조악한 성인물 포스터처럼 구성했다. 국정원 심리전단은 이런 ‘알몸 합성사진’ 제작·유포 계획을 국정원 상부에 보고한 뒤, 이를 실행에 옮긴 것으로 전해졌다.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개인의 일탈행위'는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보고서에는 “그간 운영을 통해 검증된 사이버전 수행 역량을 활용해 ‘특수 공작’에 나서겠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국정원장은 청와대에 일일 업무보고를 했다고 하니 청와대가 몰랐을 리 없다. 결국은 청와대가 가장 막대한 지분을 가진 ‘투자자’였던 셈이다.

 

 

한 나라의 정보기관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며 엘리트들만 모인다는 국가기관이 찌라시보다 못한 저질스러운 업무를 해왔다는데 대부분의 국민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가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생명줄을 잘라버리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았다는데 분노를 넘어 서글픔마저 느끼게 된다.

유효기간이 있는 권력을 임대 받았을뿐인 그들은 무슨 권리로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배우의 연기, 뛰어난 방송인의 화술을 감상할 기회를 박탈했을까. 국정원과 민간인외곽팀뿐만 아니라 사이가 나빴던 MB와 GH는 권력의 대물림을 위해 기꺼이 손을 맞잡았다. 이들의 협업 역시 장르파괴 시대에 필수인 콜라보인 걸까.

사진= 영화 '내부자들' 스틸컷, JTBC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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