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3단 변신'이다. 로맨스 드라마 '내일 그대와'로 올 초를 열고, 지난 여름 '박열'로는 불같은 에너지를 발산하더니 올 가을 찾아오는 '아이 캔 스피크'로는 감동과 웃음을 전할 예정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민원왕 할머니 나옥분(나문희)에게 원리원칙 공무원 박민재(이제훈)가 영어를 가르쳐주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앞서 코미디영화로만 알려졌지만 사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가슴아픈 이야기를 따뜻하게 담아냈다. 이제훈은 이 영화에 출연했음에도, 완성본을 처음 본 시사회에서 감동에 젖어 "나문희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를 외쳐 눈길을 끌었다. 

"평소 영화를 볼 때 만듦새나 연기, 톤, 촬영기법 등에 신경쓰면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습관이 있어요.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메시지를 관통하는 진정성이 있는 것 같아요. 보자마자 선생님께 너무 감사하단 생각부터 들었죠."

'아이 캔 스피크'는 폭력적 장면 없이도 효과적으로 위안부의 아픔을 담아냈다. 코미디영화인 까닭에 피해자들의 아픔을 가볍게 다룬 듯 보이진 않을까 걱정도 있었지만, "만드는 사람들의 자세가 너무나 진중했기 때문에" 우려는 사르르 녹았다. 

항일운동가의 생애를 담아낸 전작 '박열'처럼, '아이캔스피크' 역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한다. 일각에서는 이제훈을 더러 '개념 배우' '역사 배우'라고도 부른다. 이제훈은 지난 2월 '박열'을 마친 후, 3월 '아이 캔 스피크'의 촬영을 시작했다. 

"'박열'을 찍으며 역사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고, 그 생각이 '아이 캔 스피크' 출연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배우로서 연기로 희로애락을 전달하고 싶다는 1차적 욕망이 있는데, 그 외에 작품이 사회,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 역시 의미있고 감개무량한 일이에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빨리 해결되면 좋겠다'란 막연한 생각뿐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 캔 스피크'를 통해서 이 분들이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이라면, 내 할머니라면 가만히 있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많이 반성하게 됐죠. 이 나라를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싶고, 그렇게 되길 바라며 연기했는데 관객들에게 진심이 전해졌으면 해요."

 

 

이제훈은 작품에 대한 치열한 연구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을 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게 이번 영화는 좀 달랐다. 처음 만난 김현석 감독은 마치 알던 사이처럼 이제훈을 편히 대해줬고, 관록이 빛나는 나문희와의 만남은 특별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번 영화는 편안하게 찍었어요.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고 계획을 나름대로 세웠는데, 선생님과 만나면 제가 크게 할 게 없었어요. 바라보고 얘기하는 것만으로 제 안에서 감정들이 마구 생겨났거든요. 시나리오를 봐서 이미 알고 있는 장면인데도, 촬영에 들어가면 이상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어요. 촬영장이 너무 편하고 행복했어요. 시나리오를 봤을 때의 기대감보다도, 점점 완성돼가는 과정이 즐거워서 '이 영화가 빨리 관객들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했죠."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은 딱딱한 웃음기 없는 인상의 '영어 실력자' 이제훈을 볼 수 있다. '박열'의 일본어처럼 이번 영어 역시 매끄러운 걸 보니 언어적 재능이 있는 듯싶다. 5:5 가르마와 안경은 앙숙으로 만났던 나옥분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라는 인상을 줘야 하기 때문에 이제훈이 낸 비주얼 아이디어다.

융통성 없는 캐릭터인 박민재는 나옥분과 사사건건 부딪히기도 하는데, 이제훈 또한 원리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은 있는 편이라고 했다. 특히 작업에 대해서는.

"영화는 앙상블 작업이잖아요. 늦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함께 한 약속을 중시하자는 생각이에요. 일단 약속을 하면 거기에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도 크고요. 하지만 일하지 않을 땐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스타일이에요. 일할 때와 일하지 않을 때의 온/오프가 좀 심해요."

 

 

이제훈은 지난해 개봉한 '탐정 홍길동'부터 '열일' 중이지만 쉬고싶단 생각보단 열심히 달리고픈 열망이 가득하다. 연기 외 본인만의 시간을 보낼 때도 취미로 영화를 보며 자극을 얻는다고 했다. 

"촬영할 땐 뭔가를 배우는 데 적극적이고 잘 하고 싶어하는데, 그 외의 저는 딱히 취미생활이나 즐기는 일이 없어서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여유가 좀 생기면 여행을 가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봐요. 피곤하고 지친 상태에서 좋은 영화를 봤을 때의 기쁨이 상당해요. 또 '나도 좋은 작품에서 연기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죠. 늘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최근엔 개인의 일상보단 촬영장에서의 시간이 더 많았어요. 배우로서의 삶이 더 많이 채워졌죠. 지쳐서 쉬고싶단 생각도 들지만, 작품을 통해서 느낀 충만한 행복이 있기에 일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소진되어 더이상 못하겠다'는 마음보단, 작품으로 많은 사람과 사랑을 얻은 덕분에 더 왕성하게 연기하고 싶다는 에너지가 생겨요. 예전엔 연기를 잘하고 싶단 생각에 앞만 보고 달렸는데, 지금은 지나온 길도 되돌아보면서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더 소통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혹시나 행보가 늦어지더라도 소통하고 작품의 의의를 생각하며 신중히 나아가고 싶어요."

 

사진=리틀빅빅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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