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앞으로 다가온 한가위, 추석 연휴가 반갑지 않은 여성들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다.

 

1. 차례상

지난 추석을 회상해본다. 여자는 감히 절할 수도 없는 차례상을 가족들이 삥 둘러 싼다. 제주인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나가서 절을 하신다. 그 다음에 큰아빠랑 아빠가 절을 하신다. 그리고 그 다음엔 겨드랑이 털도 안나게 생긴 15살짜리 사촌동생 차례다. 우리집은 딸만 셋인데, 쟤는 늦둥이 외동 '아들'이라는 이유로 감히 차례상엔 절도 못하는 우리들과 달리 대우 받는다.

저 망할놈의 차례상 위에 있는 음식들은 전부 우리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졸음 이겨가며 차린 것들이다. 저 차례상을 차릴 때 남자들이 도와준 건 상다리 펴서 바닥 위에 세워둔 것밖엔 없다. 몇년 전부터, 조용하게 차례가 진행되는 분위기를 뚫고 미친척 난입해 난동을 부리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곤 한다. 조상님들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준비했다고 외치며 막춤파티를 여는 개꿈 같은 상상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엄마의 뒤에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서 소외감과 단절감을 느낀다. 사촌동생은 어릴 적부터 인터넷에 올라오는 사연들처럼 내 장난감을 훔쳐간다거나 대들거나 한 적은 없지만, 저 제사 따위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남자라는 이유로 갖고있다는 게 얄미워 죽을 지경이다. 물론 내게 주제할 권한이 생긴다면 당연히! 절대로! 제사를 안 할 것 같지만. -박주X, 서울

2. 명절증후군

'명절증후군'이란 말, 성별에 따라 의미가 나뉘는 게 정말 재밌는 것 같다. 여성들에겐 차례상을 차리고 온 식구들 먹일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등의 가사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고, 남성들에겐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누적되는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뜻한단다. 우리 가족만 이런게 아니라, 전세계에서 딱! 대한민국 사람들만 공통적으로 똑같은 증후군을 겪는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웃프기 그지없다.

명절날 여성과 남성이 각자 느끼는 스트레스는 하나의 단어로 묶어버릴만큼 똑같은 수준이 아닌 것 같다고 아빠에게 말했더니, 남자들이 겪는 운전 스트레스 또한 여성들 못지 않다고 답하시더라. 그럼 이번 명절에는 내가 운전할테니 아빠가 가서 부엌일 하겠냐고 했더니, 그저 허허 웃고는 방에 들어가버린다. -석XX, 수원

3. 여자는 부엌, 남자는 거실

과연 차례상 뿐일까? 엄마와 나, 숙모들은 명절마다 조부모 댁에 가자마자 중노동 시작이다. 왜냐면 스무명이나 되는 식구들 먹일 밥부터 해다 바쳐야 하거든… 또 대충 내가면 싫어할테니, 갈비부터 시작해서 찌개에 잡채에… 온갖 진수성찬을 마련해야 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 것 같다.

거실을 빼꼼 내다보면, 저녁밥이 다 될 때까지 기다리는 남자들의 역할은 그저 거실에 모여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밥 하기 전에 깎아준 과일을 집어먹는 거다. 여자들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밥을 준비할 동안, 남자들만이 TV를 보며 와하하 떠들고 있는 광경은 가끔은 정말 기괴할 정도다. 아직 초등학생인 사촌 여동생도 거실에 앉아 사과를 주워먹고 있지만… 몇 해만 더 지나면 부엌으로 질질 끌려올 운명일테다.  -구XX, 안양

4. 밥상

나와 내 여동생이 명절에 더이상 시골을 가지 않는 이유다. 어렸을 때부터 쭉, 우리 가족들은 식사를 할 때마다 남성과 여성이 다른 밥상에 앉아 먹는 풍습이 있었다. 넓직하고 튼튼한 직교자상 위에는 시골집에서 가장 비싼 식기와 반찬들이 놓이지만 그 자리를 둘러앉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남성들 뿐이었다. 반면 좁아 터진 앉은뱅이 밥상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이 빠진 그릇을 달그락거리는 건 순전히 여성들의 몫인 셈이었다. 21세기에, 이게 가당키나 한가.

심지어 우리 집안에서 가장 어른인 할머니도 꼭 그 자리에서 드셨고, 여동생이나 내가 비계가 아닌 살코기가 많이 붙은 갈비가 먹고 싶어 큰 밥상에 앉으려고 하면 역정을 내며 이리 오라고 손짓하셨다. 어느 정도 머리가 큰 우리는 어느날 '왜 여자들은 저 밥상에서 먹을 수 없는 거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무도 우리의 얘길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히 따라야 할 명절 문화를 거스르려는 '요즘 것들' 보듯 하며 혀를 찰 뿐이었다. -최XX, 대전

5. 선 시댁 후 친정

명절 전날과 당일 아침엔 시댁에 가있어야 하고 처가는 막날에 잠깐 들렀다 떠나는 이런 명절이 5년째 이어져왔다. 왜 불공평하다고 느끼지 않았겠는가. 친정도 아쉬운 기색을 드러낸 적이 종종 있었기에, 나나 남편이나 친정 부모님께 나름의 신경을 써드리려고 노력하던 차였다. 남편은 울 부모님께 정말 잘해드리는 편이지만 명절만 되면 너무 짧게 머물고 가는 것 같아 할말이 없단다.

저번날 엄마랑 통화하다가 은근슬쩍 추석엔 시댁 대신 친정 먼저 갈까 고민중이라고 말했더니, "그러면 안되지…"라고 답하시면서도 우물쭈물하신다. 자주 못내려가는 딸래미가 보고싶기는 한데, 시댁에 밉보이는 건 또 마음에 걸리시나보다. 시댁에 그렇게 제안드릴 용기도 없으면서 엄마께 괜한 말을 해 기대만 드높인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그저 매번 명절마다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게 싫은데 어떻게 타파해야할지 모를 뿐이다. -김윤X, 수원

6. 불편함이 앞서는 여행

직장 생활 4년차에 접어들었다. 돈을 모으니 휴가철만 되면 떠나는 여행이란 게 그렇게나 재밌더라. 지난 여름에는 스페인에서 꿈만 같은 시간을 보내다 왔지만, 올 여름에는 급성질환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지느라 휴가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대신 올해 추석 연휴가 역대 최장기간이 될 것 같다길래, 망설임 없이 일본 왕복 비행기를 결제해놓았던 게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노발대발이다. 정작 우리 부모님은 아무말 없으신데, 큰엄마와 친척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차례대로 전화해 그것 좀 안가면 안되겠냐고 난리다. 내가 죄송하다고, 회사 생활에 치이느라 이번 연휴엔 좀 쉬고 싶다고 거절하자 속마음을 드러낸다. 명절날 일손도 부족한데 너 하나 빠지는 게 얼마나 타격이 크겠냐고 그런다. 시골 와서도 맨날 방에 들어가 게임만 하는 승범이(큰엄마네 아들, 나랑 동갑)를 나 대신 시키라니까, 난생 처음으로 내게 언성을 높이더라.

우리 부모님은 그냥 가서 푹 쉬다 오라고 하시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도 내게 전화를 한번씩 하신 걸 보니 탐탁지 않은 눈치다. -이지X, 서울

 

 

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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