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 기다림 끝에 상영관에 간판을 내걸었다. 지난해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화제를 일으켰던 독립영화 ‘분장’.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발견’이 된 남연우(35)가 연출, 주연한 영화는 무명 연극배우 송준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소수자 연극 ‘다크 라이프’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며 펼쳐지는 비밀과 거짓말을 다룬 작품이다. 부국제에서 첫 공개된 후 제42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 선택상, 2016 서울프라이드영화제 핑크머니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서울프라이드영화제 출품 당시 많이 망설였다. 이 이야기가 그들에게 잘 다가갈지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상을 수상해 굉장히 큰 의미로 받아들였다. 서독제의 새로운 선택상은 연출 전공이 아닌 자신이 생각나는 대로 연출한 게 투박하지만 새롭게 다가갔음을 인정받은 것 같아 각별했다.”

개봉(9월27일)을 앞두고 설렘과 걱정, 감사함을 날카로운 눈매에 탑재한 그를 충무로 뒷골목 수제맥주집 브아브아에서 만났다. 진하고 쌉싸름한 에일맥주 향이 퍼져나갔다.

“흔히 저예산 영화라고 하면 고정관념이 있는데 ‘영화는 영화다’라고 봐줬으면 좋겠다. 독립영화든 상업영화든 경계를 나누고 싶지 않으나 많은 관객들이 흥미롭게 봐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다. ‘분장’ 때도 독립영화를 멋있게 만들 거야가 아니라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재밌게 볼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이성애자인 송준은 연극 주연에 캐스팅되며 성 소수자들을 만나 소통하기 시작한다. 그들을 이해한다고 느낄 즈음 무용수인 동생의 성 정체성에 맞닥뜨리며 극심한 혼란으로 빠져든다. ‘분장’의 소재는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새롭진 않다. 세련된 연출력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과 액자극을 오가며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는 창작자의 뚝심과 진정성이 느껴진다.

 

 

퀴어코드 영화, 연극, 뮤지컬이 하나의 장르를 구축할 정도로 많은 시대다. 시나리오와 연출을 도맡은 그는 어떤 메시지를 동시에 관객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성 소수자를 소재로 인간의 위선 그로 인한 파멸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보통 성 소수자 영화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든가 아픔을 1인칭 시점으로 다루는데 ‘분장’은 그들을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으로 끌고 간다는 게 달랐던 것 같다. ‘분장’을 위해 자료를 찾아보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내가 너무 무지했다. 영화를 찍기 전과 후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인정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고 여긴다. 페미니즘이나 성 소수자 관련 팟캐스트를 들으며 계속 관심을 벼리고 있다. 앞으로도 더 들여다보려고 한다.”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들의 세계에 완전히 들어가 있던 사람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다뤘을 땐 누구에게도 폭력적이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현실 그대로 담아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거에 대해 인터뷰를 했고,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성소수자 친구에게 보여줬다. 폭력적이거나 희화화된 부분은 없는지 등등 자문을 구했다. 촬영 현장에는 극중 트랜스젠더 강이나 역 홍종호 배우의 연기를 지도해준 트랜스젠더가 나와 캐릭터가 조금이라도 희화화되지 않도록 잡아줬다. 송준과 깊은 교감을 나눴던 이나가 위선적인 송준에 대해 설명적인 대사가 아닌 자기 정체성의 역사와 아픔을 드러내는 노래로 처리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형제, 절친, 소울메이트마저 떠나가는 과정이 이 장면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났다.”

 

 

자본 대신 열정을 지닌 이들이 그렇게 하듯 가내수공업 성격이 짙다. 대학(한예종 연극원 연기과) 교수와 선후배·동기들, 이전 독립영화에서 인연을 맺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독립영화로 치부하기엔 화려한 캐스팅의 비결이자 “이야기와 연기 모두가 좋았다”는 호평을 들은 원동력이다. 여기에 그의 음악에 대한 조예, 워커홀릭과 같은 집착이 ‘때깔’ 좋은 프로덕션을 뽑아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극중 연극의 연출자 역은 최용진 교수님이 맡아 주셨다. 4년 동안 선생님으로부터 인물의 논리를 따라가는 수업을 들었다.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를 할 때 이 법칙을 따를 만큼 배우로서 나의 뿌리를 만들어주신 분이다. 리허설 때 선생님이 배우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진행해주시기도 했다. 내가 말했던 인물로 이미 구축을 해오셨고 디렉팅에도 그대로 따라주셨다. 양조아 이수광 배우는 동기들이고 안성민 배우는 연기학원 제자다. 3대가 출연한 셈이다.(웃음) 홍종호 배우는 고교시절 독립영화 ‘가시꽃’에서 공연했던 오랜 친구다. 그래서 연기할 때 즐거웠다.”

원래 체대 진학을 꿈꿨다. 영화를 접한 뒤 대학 연극영화과를 지망했다가 모두 떨어졌다. 그래서 군입대를 했다. 제대 후엔 대학에 대한 생각이 들질 않아 연극과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다 뒤늦게 한예종에 입학했다.

 

 

군 제대 후 첫 영화가 제1회 환경영화제 개막작인 옴니버스 영화 ‘1.3.6’(감독 장진 이영재 송일곤)이다. 남연우는 이영재 감독의 작품 ‘뫼비우스의 띠- 마음의 속도’에 불량학생 4인방으로 출연했고, 그때 양아치 친구로 호흡했던 배우가 동갑내기 구교환이다. 그 역시 배우 겸 감독으로 현재 주목받고 있으며 공교롭게 지난해 ‘꿈의 제인’에서 트랜스젠더 제인 역할로 화제를 뿌렸다.

올해도 부산국제영화제와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장편 시나리오 ‘내 나이 열네살’이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 지원작으로 선정됐다. 영화제 마켓에서 투자자들을 만나는 일정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섬마을 열네살 소년이 15년간 수감됐다가 출소한 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다가 결국 도시의 홈리스가 되는 이야기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된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억울하게 누명 쓴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었다”고 전한다.

 

사진 지선미(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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