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가 호평받은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 아픔을 이토록 따뜻하고 유쾌하게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준 신선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할머니 나옥분(나문희)과 공무원 박민재(이제훈)의 영어 배우기를 다룬 코미디영화같지만, 그 속에는 위안부 문제가 녹아있다. '쎄시봉' '시라노:연애조작단' '스카우트' '광식이 동생 광태' 등에 이어 '아이 캔 스피크'로 스크린을 따스함으로 수놓은 김현석 감독을 만났다. 

 

 

- 코미디 영화와 위안부 소재의 만남이 신선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느낌은 어땠나.

아무 정보 없이 시나리오를 읽었다. '동네 참견쟁이 할머니와 고지식한 공무원의 고만고만한 코미디구나. 미국에 입양 간 자식이 나오겠지' 그런 마음으로 읽고 있었는데, 옥분의 사연이 밝혀지고부터 훅 몰입해서 봤다. 반전에 집착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두 번 봤을 때 느낌은 색다를 것 같다. 옥분의 사연을 몰랐을 땐 오지랖 넓은 민폐 할머니로 볼 수도 있는데, 다시보면 또다르게 다가온다. 

- 위안부 문제를 코미디영화로 푸는 것에 대한 고민이 깊었을 듯싶다. 

'스카우트'(2007)를 만든 적이 있어 자신은 있었다. 제작사 명필름 심재명 대표님도 "'스카우트'처럼 만들면 되겠다"고 먼저 말씀하셨다. '쎄시봉'이나 '시라노 연애조작단' 감독이라고 생각하면 시나리오를 안 줬을 수도 있는데, '스카우트'도 염두에 두셨던 게 아닌가 싶다.

- '스카우트' 역시 광주항쟁을 코미디로 풀어냈는데, 명작으로 꼽는 영화 팬들도 꽤 많다. 

흥행엔 참패했는데, 종종 언급해줄 때 생각지도 못한 기쁨이 있다. '스카우트'는 2000년에 대학원 과제로 극본을 썼던 영화다. 고향이 광주인데,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무슨 일이 나는지도 모르고 그저 '학교에 안 가서 좋다'고 생각했었다. 실제 내가 겪은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코미디영화로 만들 수 있느냐'고 비난하더라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아이 캔 스피크' 역시 그렇다. 상처를 보여주는 것도 의미있지만, 피해자가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매력을 느꼈다. 막 오열하지 않아도, 아픈 사람이 담담히 얘기하는 게 더 슬픈 경우가 있잖나. (위안부 관련 폭력적 장면이 없는 것도) 이미 관객이 그 역사에 대해 다 알고 있으니 직접적인 표현을 안 하려 했다.

- 후반부에 분위기와 내용이 확 달라지는데, 무리 없는 전개를 위해 전반부 코미디가 강하지 않고 잔잔히 흘러간 것 같다는 평도 많았다. 

자의 반, 타의 반이다. 원래 직설적인 코미디보단 엇박을 타는 걸 좋아한다. 원래 시나리오의 코미디는 보다 쉽고 직접적이었는데 나와는 안 맞았다. 그 코드를 내 식으로 느슨하고 썰렁하게 바꿨는데, 무거운 소재로 넘어갈 때 마침 위화감을 줄이는 역할을 해 준 것 같다. 

 

 

- 나문희와의 호흡은 어땠나. 

선생님은 두어번의 대본 리딩을 거치면 영화 전체적 해석을 완벽히 해 오신다. 배우와 감독 간 해석이 달랐던 적이 전체 촬영을 통틀어 5번 정도밖에 안 된다. (예를 들자면?) 영화에 쓰인 의회 신에선 "예스, 아이 캔 스피크"를 조금 비장하게 말씀하시는데, 원래 촬영 때는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씀하셨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선생님은 사람이 몹시 긴장하면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표현하셨던 것 같다. 

에너지를 좀 아끼셨다가 본 촬영 때 100% 다 쏟으실 때가 있어서, 대본리딩과 리허설을 거치는데도 어떻게 연기하실지 전혀 짐작이 안 간다. 민재의 뺨을 때리고 "거짓말!" 소리쳤을 때, 산소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에선 모니터 너머로 소름이 끼쳤다. 선생님이 연기하실 땐 다른 건 생각할 겨를 없이 가슴이 오케이 사인을 줄 때가 있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뿐 아니라 스태프 모두가 그렇게 느꼈다. 

- 산소 장면에선 많은 관객이 눈물을 흘렸다.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나. 

국내 촬영 마지막날이라, 일찌감치 세팅해놓고 해질녘 광선을 기다리며 기념사진을 찍는 '쫑 분위기'였는데 큰코 다쳤다. 소품 무덤의 잡초가 어설프게 심어져 있어서, 나문희 선생님이 풀을 뜯으며 리허설하시던 중 흙덩이가 뜯겨서 감정이 확 깨지신 거다. 연기 리듬이 깨지고 해도 질 것 같고, 촬영이 위태했다. 그때 선생님께서 순간적으로 몰입을 확 하셨다. 선생님은 방금 전 연기가 마음에 안 드실 때, 촬영을 끊었다가는 시간이 없으니 끊지 않고 다시 처음부터 이어서 하실 때가 있다. 그때도 그렇게 다시 돌아가 감정을 터뜨리셨는데, 가슴이 오케이 사인을 딱 내렸다. 

- 박민재 역의 이제훈은 어땠나. 

민재와 실제 배우가 비슷하다. 꼼꼼하고 자기관리에 투철하고, 술도 안 먹고 생각이 올바르다. 바른생활 사나이가 우리나라에선 왠지 재미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데, 그런 면이 민재와 비슷한 것 같다. 올해 상반기는 '박열', 하반기엔 '아이 캔 스피크'에 출연했는데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 행보가 멋있다. 

구청의 경우 주말만 빌릴 수 있어서 띄엄띄엄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 제훈씨의 연기 로직이 빛났다. 제훈씨는 영화 전체를 설계해두는 사람이라, 순서대로 찍지 않더라도 각 장면에 맞는 연기를 딱딱 했다. 난 제훈씨만큼 설계돼 있지 않아서 촬영하면서는 '뭐지?' 싶을 때가 있었는데, 1/3쯤 찍고보니 큰 그림이 보이더라. 나문희 선생님이 스스로 리듬을 만들어가는 동물적인 감각을 지녔다면, 제훈씨는 굉장히 논리적이고 단련하는 배우다. 

- 주변 인물에게도 애정을 쏟은 게 느껴진다. 시나리오의 설정인가, 각색의 결과물인가.

시나리오에 인물은 다 있었는데 각색하면서 디테일을 살리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를 만들려 노력했다. 특히 구청 사람들에겐 제 색이 들어가 있다. 좀 한심하고, 희화화까진 아니지만 '공무원스러운' 캐릭터들이다.

구청 사람들의 경우 이제훈과 함께 다같이 다니는 조합을 생각해 비주얼과 연기스타일을 생각해 캐스팅했다. 시장 사람들 역시 오른팔 진주댁(염혜란), 앙숙같지만 미워할 수 없는 족발(이상희). 본래 두 캐릭터 모두 실제 배우들보다 나이가 둘다 좀더 있는 설정인데 워낙 연기들을 잘 하다보니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들 연기를 참 잘하지 않았나. 진주댁이 옥분과 함께 우는 장면은 편집하며 몇 번이고 봤다. 신기하게도 배경음악이 없을 때 더 슬프더라.

 

- 김현석 감독의 영화는 따뜻하고 사람 냄새가 난다는 평이 많다. 

난 사실 건조한 사람에 가깝다. 오글거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따뜻한 정서를 잘못 풀지 않도록 노력한다. 건조한 따뜻함이라고 해야 할까?(웃음)

- 현장에서 어떤 스타일의 감독인가. 

나문희 선생님 말씀으론 밥도 제일 빨리 먹고, 촬영이 끝나면 현장을 가장 먼저 빠져나가는 감독이라고 하더라.(웃음) 기본적으로 현장은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각자의 자율에 맡긴다. 자유가 아닌 자율인 게 중요하다. 

연기자와의 소통의 경우, 기본적으로 믿는다. 어차피 최종적으로 연기하는 사람은 연기자다. 이번 촬영을 하면서도 간단한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감독이 할 일은 다른 것 없이, 정말 연기를 잘하는 사람을 어울리는 역할에 캐스팅해 최대한 역량을 발휘하게 멍석을 깔아주는 것뿐이다. 그거면 된다. 

 

사진=리틀빅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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