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그 아픈 역사의 한복판을 조명한다.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에서 조선의 운명을 두고 항복이냐 항전이냐에 대해 벌어진 논쟁을 그린다. 극 중 이병헌(47)은 항복의 굴욕을 견디고 생존해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이조판서 최명길 역을 맡아 최고의 연기를 선보인다.
 

숱한 작품에서 ‘믿고 보는 배우’로 탄탄히 자리매김한 이병헌의 에너제틱한 이미지에 비해 최명길은 다소 심심한 캐릭터다. 스펙터클한 액션은 없고, 러닝타임 내내 인조(박해일)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말싸움만 해댄다. 하지만 이 단조로움을 뚫고 그는 색다른 ‘논쟁 스펙터클’을 완성해 눈길을 끈다.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날, 삼청동에서 만난 이병헌은 ‘남한산성’에 대해 “정말 용감한 영화”라는 짧고도 강한 감상평을 남겼다. 전쟁을 소재로 한 여타 영화와 비교해서 액션이 많지도 않고, 또 ‘패배’의 역사를 과감하게 조명한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관객들이 감정몰입을 하기 위해서는 한 인물의 시선으로 우직하게 끌고 나가는 힘이 있어야 편하잖아요. 그래야 더 의도한대로 통쾌함을 전할 수 있을 텐데, ‘남한산성’은 항복하자는 최명길과 항전하자는 김상헌(김윤석)의 시선을 오가는 영화예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구조지요. 극적인 재미가 극대화됐다기보다는 굉장히 깊은 고민과 많은 생각거리를 남기는 작품입니다.”

 

‘남한산성’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조선, 청과의 화친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결사항전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예조판서 김상헌의 치열한 논쟁을 그린다. 이병헌은 “서로 다른 신념을 가졌지만 둘 다 백성을 위한 깊은 충심을 지녔다”는 점을 작품의 매력으로 꼽았다. 하지만 두 캐릭터가 벌이는 ‘말 대결’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고 술회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멋졌어요. 물론 스펙타클한 액션은 없지만 그 어떤 액션보다도 더 치열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표현하는 건 배우의 몫이잖아요. 굉장히 부담이 있었지요. 오직 말로써 서로의 소신을 주장하고 설득시키려는 그 부분이 어떤 액션보다 강렬하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연기에서도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지요.”

 

이병헌은 지난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천만 배우에 등극한 바 있다. 아직도 많은 팬들에게 그는 광해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한산성’에서 그가 맡은 최명길은 광해를 몰아낸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됐네요.(웃음) 근데 크게 보면 광해와 최명길의 마음가짐이 다르지 않아서 혼란스럽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백성의 목숨을 위하는 인물들이잖아요. 극 중 명길이 ‘백성의 목숨을 살리려는데, 왕이 오랑캐 발밑을 기는 게 무슨 대수냐’는 대사를 해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의 광해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았죠. 두 작품 모두 진정한 정치의 올바름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부분이 영화의 가장 큰 메시지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닿는 대사가 ‘난 왕을 위해서 이 결심을 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에요. 민초의 입장에서는 누가 왕이 되고, 정권을 잡는 게 중요하지 않잖아요. 솔직히 청나라가 지배를 해도 먹고 살 수만 있다면 나은 것일 수도 있어요. 만약 ‘남한산성’에서 아주 치열한 정치싸움을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뒤통수를 조금 세게 맞는 느낌을 받으실 거에요.”

 

대한민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두 배우, 이병헌과 김윤석의 캐스팅만으로도 ‘남한산성’을 일찌감치 큰 기대를 받아왔다. 더군다나 작품 속에서도 직접 맞대결을 펼치는 역할이다. 자연스럽게 둘의 호흡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이에 이병헌은 “기싸움은 없었다”며 웃어보였다.

“처음 호흡을 맞춰보는 배우와는 늘 긴장감이 있어요. 그게 기대감인지 불안감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웃음) 하지만 결국 영화가 의도하는 것을 배우의 시너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연기 대결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것 같아요. 명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 땐 내가 더 강해야 하고, 상헌의 소신이 빛나는 신이라면 거기에 맞춰서 눌러야 하는 거지요. 서로 그 부분에서 합이 참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이병헌은 김윤석과의 호흡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묘한 미소를 띠면서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와의 연기에서 “묘한 재미를 느꼈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서로 참 다른 패턴의 연기를 하는 배우인 것 같아요. 정말 묘한 재미를 느꼈어요. 물론 굉장히 어려웠지요. 촬영에 들어갔을 때, NG가 나서 다시 연기를 해야할 때마다 매번 느낌이 달랐어요. 연기가 대화의 호흡이 가장 중요한 거잖아요. 변화한 강도에 맞춰서 또 제 리액션이 바뀌어야만 해서 긴장을 놓을 수 없었죠.(웃음) 때에 따라서는 제가 수세에 몰린 것 같은 느낌도 들더라고요.”

  

대중에게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지닌 브랜드 가치는 상당하다. 최근에만 해도 ‘마스터’(714만), ‘밀정’(750만), ‘내부자들’(707만)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캐릭터를 흡인력있게 표현하면서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젠 관객들의 반응에 마음을 비울 법도 하지만 그는 “아직도 관객들의 반응을 크게 신경쓴다”는 말을 전했다.

“예전에는 제가 나오는 영화를 참 많이 봤어요. 배우들이 보상받는 시간인 거 같아요. 상영할 때 관객들 뒤에 앉아 보면서 반응을 느끼는 걸 좋아했어요. 최근엔 많이 못갔지만, ‘공동경비구역 JSA’ 때는 한 40번 갔던 것 같아요. 웃고 울고 하시는 모습을 보면 저도 함께 즐거워져요.(웃음)”
 

하지만 그는 엄청난 흥행을 하는 것보다도 관객들에게 ‘참 좋은 작품을 봤다’는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다는 희망을 조심스레 밝혔다.

“당연히 제가 참여한 작품이 많이 보여지는 게 좋죠. 그런데 무조건 흥행만 따지면 정말 의미 있는 필모그래피가 쌓이지 않을 것 같아요. ‘남한산성’은 그런 뜻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이야기가 주는 무게감도 있고, 세련된 느낌까지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바로 드는 작품이지요. 물론 너무 저희 작품 칭찬하면 팔불출 같지만, 관객분들도 분명 ‘좋은영화’라고 느끼실 겁니다. 제 필모그래피에 이 영화가 추가됐다는 게 꽤 뿌듯해요.(웃음)”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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