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찍고나니 '이걸 어떻게 했을까' 생각이 들어요. 다시 하라고 하면… 어휴, 못할 것 같은데요? 호호."

 

'국민 엄마'의 완벽한 변신이다. 배우 김해숙(61)의 밝은 얼굴에선 '희생부활자'(감독 곽경택) 속 명숙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희생부활자'의 명숙(김해숙)은 7년만에 돌아와 아들 진홍(김래원)을 살해하려는 섬뜩한 어머니다. 김해숙을 지난달 27일 인터뷰했다. 

'희생부활자'는 억울한 죽음 뒤, 복수를 위해 살아돌아온 사람을 뜻한다. 첫 장면에서부터 김해숙의 연기는 강렬하다. 거센 비를 맞고, 오토바이 날치기로 인해 길바닥을 끌려다니다 살해당한다. 말그대로 온몸을 내던지며 연기한다. 그동안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히는 감정연기는 종종 소화했지만 이처럼 몸을 쓴 작품은 흔치 않았다. 이런 거친 촬영에, 김해숙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 조금이라도 아프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내내 약을 달고 살았다. 

"몸과 정신을 쏟아냈어요. '인생에 새 획을 그을 작품'이라고 얘기했는데, 오버스럽게 들릴진 몰라도 그 정도로 힘들었죠. '내가 액션배우로 다시 태어난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촬영이 잡히면 그 전날부터 '제발 안 다치고 무사히 찍게 해 주세요' 기도를 했어요. 그래도 많이 배려해주신 덕분에 안 다치고 잘 끝낼 수 있었어요. 부담감이 심해서, 촬영을 마치고서도 좀 앓았죠."

명숙은 그동안 수많은 어머니를 연기한 김해숙에게도 충격적인 캐릭터였다. 지금까진 없었던 충격적인 엄마였기 때문인데, 아들 역인 김래원도 '희생부활자'를 통해 그동안 몰랐던 김해숙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됐다고 했다. 특히 인자하던 명숙이 돌변해 칼을 치켜드는 초반 장면에서는, 그 섬뜩함에 당황한 표정이 스크린에 그대로 담겼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예고편을 보고 '내가 저렇게 무서운 여자였나' 싶었어요. 제가 봐도 무섭더라고요." 

그러면서도 '희생부활자' 후반부에는 진한 모정을 느낄 수 있다. 김해숙은 연기하며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시나리오가 충격적이라 읽다 금방 덮어버렸는데, 다시 들춰보니 흥미로워 끝까지 읽게 됐어요. 덮고 나선,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가장 먼저 났어요. 돌아가신지 3년 됐는데, 이 영화를 찍을 때 엄마에 대한 여러 감정이 남아있었거든요. 속죄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어요. 이 얘기는 처음 해 보네요."

 

 

상대배우 김래원과는 각별한 관계다. '해바라기' '천일의 약속'에 이어 세 번째로 모자 호흡을 맞췄기 때문인데, 연락은 통 안 하는 무뚝뚝한 성격인데도 막상 만나면 호흡이 편하다. 

"래원이는 '해바라기' 때도 보통 아이들과 좀 달랐어요. 말수는 없는데 연기할 땐 자신의 몸을 불사른다고 해야 할까, 너무 빠져들어 걱정될 정도였는데 그 모습이 신선했어요. 성격은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그래도 이젠 제게도 어리광을 좀 부리더라고요. 어리광도 무뚝뚝해요. '엄마~' 하면서 살짝 기대는 정도? 근데 얘기를 하면 또 재밌어요. 내가 래원이에게 너무 빠져있죠?(웃음) 눈빛만 봐도 서로 통하고, 믿음을 주는 사이이기 때문에 연기할 땐 참 고마워요."

김해숙에게 자주 붙는 수식어는 '국민 엄마'다. 그만큼 인자하고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많이 연기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그런 수식어가 서운하진 않을까 싶었는데, 김해숙은 어머니 연기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서운하긴요. 제 나이에 가장 잘, 많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엄마인걸요. '엄마 연기'가 하나의 장르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엄마'는 가장 쉽고 가깝고 편할 것 같지만, 동시에 가장 어렵고 힘들고 깊은 단어가 아닌가 생각해요. 한때는 '난 왜 엄마 역할밖에 못 할까', '배우로서 존재감 있는 역을 하고싶다'는 욕심이 있었는데, '해바라기'를 통해 생각이 바뀌었어요. 엄마에게도 이토록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 이후부터는 김해숙이란 사람 안에서도 조금씩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단 생각으로 임해왔어요. 혹시나 전작에서 보였던 모습이 또 보이면 어쩌나, 작품이 늘어갈수록 두렵고 고통스러워요."

 

 

중년배우들의 자리가 줄어간다는 말이 무색하게, 김해숙은 다채로운 캐릭터를 소화하는 다작 배우다. "여자 오달수, 이경영이 되는 게 내 꿈이다"라는 겸손한 너스레로 취재진을 웃긴 김해숙은 "작은 역이라도 캐릭터가 다 다르기 때문에 재밌고 행복하다"고 했다. 그의 연기관은 간단명료하다. 

"연기관은 따로 없어요. 그냥 내 자신을 버리고 그 역할이 되고자 해요. '아가씨' 때도 감독님이 원작 소설을 주셨는데 기분 나쁘셨을지 모르지만 '안 읽었다'고 고백했어요. 혹시나 잔상이 남을까 싶어서요."

'아가씨'의 사사키 부인, '도둑들'의 씹던껌, 촬영 중인 '허스토리'의 위안부 피해자까지. 결코 흔하지 않은 캐릭터를 맡아 왔다. 앞으로도 다작해 '여자 오달수·이경영이 되고 싶다'는 김해숙은 특별한 꿈을 밝혔다. 

"센 캐릭터를 좋아해서, '무방비도시'에서 그랬듯 센 역할을 맡아보고 싶어요. 남자 보스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어둠 속의 여자들을 연기하고 싶어요."

 

사진=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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