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로 리즈 국제콩쿠르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반열에 오른 김선욱(30)이 제22회 부산 국제영화제를 찾았다. 클래식 연주자가 음악제가 아닌 영화제를? 단순히 게스트가 아닌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받은 ‘황제’(감독 민병훈·이상훈)의 주연배우로 짧지만 굵은 3일간의 활동을 펼쳤다. 런던으로 출국하기 전날인 14일 밤 그를 만났다.

 

 

지난 12일 개막식에서 그는 고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추모 연주를 진행했다. BIFF 창설 멤버이자 20여 년간 아시아 영화를 발굴하고 소개해왔던 그의 열정과 업적을 기리는 영상이 흐른 뒤 김선욱은 바흐 ‘칸타타 BWV 106’을 한음 한음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연주했다. 야외 객석에 운집한 관객과 영화인들은 숨죽여 그의 시정 짙은 타건에 귀를 기울였고 감동이 영화의전당을 가득 채웠다.

“고인을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많은 이들이 존경하고 영화제에 공헌을 많이 했던 분이라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의 세상은 최상의 세상이로다’란 부제로 알려진 연주곡도 굉장히 의미가 있었다. 단순히 아름다운 게 아니라 바흐가 장례식 때 사용했던 애절하면서도 숭고한 느낌의 곡을 선택했다.”

월드 프리미어와 관객과의 대화, 14일 오후 7시 해운대 비프 빌리지에서 열린 토크콘서트, 오후 9시 ‘황제의 밤’ 특별 무대 등 빼곡한 일정이 이어졌다. 부산에 머무는 중에도 다음주 독일 베를린의 피에르 불레즈홀(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곡가이자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의 이름을 따 올해 개관해 화제를 뿌린 실내악 전당)에서 열릴 연주회 연습에 매진하는 강행군이었다. 평소 강철 체력으로 유명한 그의 얼굴이 다소 수척해 보였다.

“영화제 참석이 힘들긴 하더라.(웃음) 다른 영화들도 보고 즐기면 좋았을 텐데 스케줄 때문에 다시 런던으로 가야하는 데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파운더인 피에르 불레즈홀 시즌 연주회 연습도 해야 하니까...더 많은 것들을 접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무엇보다 세계 각국을 도는 연주와 연습, 새로운 레퍼토리 연구, 레코딩 일정만으로도 눈코 뜰 새가 없는 그가 ‘일반’ 영화에 ‘주연으로’ 참여했다는 소식은 영화계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계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황제’ 제작기간은 무려 2년에 이르며 국내와 유럽 일대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왜 하게 됐을까.

“음악, 영화 모두 예술의 한 장르이고 예술은 의식주처럼 무언가를 얻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지 않나. 음악회에서 몇 시간 음악을 듣거나 극장에 가서 2시간 동안 한 편의 영화를 봄으로써 일상의 피곤함을 해소할 수 있고, 힘을 얻을 수도 있고,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이것도 그 중의 한 부분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무대에서 연주하는 건데...도전이다 외도다, 이런 평가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작도 끝도 단순했다."

민 감독의 제안을 받고 그의 철학이나 영화 스타일과 궤를 같이 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 호러영화, 코미디라든지 김선욱의 자전적 영화였다면 말도 안 된다고 거절했을 거라고 부연했다.

"영화를 위해 몇 개월간 새로운 준비, 예를 들어 새로운 음악을 준비한다거나 스타일을 바꾼다거나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배우로서 연기를 한 게 아니라 평소 나답게 행동했고 그것을 영화에 녹여주셨다. 웃지 말라고 하면 안 웃었고,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큰 부담 없이 임할 수 있었다. 감독님이 영화를 하시는 목적이 있듯이 나도 음악을 하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에 부합하는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하고 참여할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 이 영화의 키워드처럼 음악이 사람들한테 좋은 영향을 끼친다면 나도 예술을 하는 자부심이 고취되는 거니까. 인생에 한번쯤 이런 기회가 있다면 빨리 찾아와서 다행이다.”

 

 

베토벤의 그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제목이기도 한 ‘황제’는 우울과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 스스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려던 청춘들 앞에 마음을 울리는 피아노 선율이 기적처럼 울려 퍼지며 위로와 사랑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에는 김선욱이 연주한 ‘황제’를 비롯해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등의 곡이 흐른다.

“헝가리, 이탈리아, 영국 촬영 장면은 나의 연주 스케줄에 맞춰 현장에서 찍었다. OST 레퍼토리들은 거기서 연주했던 곡들이다. 재작년 연말에 대전에서 ‘황제’를 연주했을 때도 오셔서 연주하는 모습을 담아갔다. 완성된 작품을 보니 미장센과 음악이 힐링이라는 영화를 감싸고 있는 주제와 잘 맞아 떨어진 느낌이었다. 음악은 장면과 어우러졌고 충분히 고려한 곡들의 연결 등 테이크 하나하나가 고민의 조각들로 다가왔다. 다만 내 연주를 보고 들었을 때 부끄러웠다. 아무래도 청자가 돼본 지가 굉장히 오래 됐기에 친숙하질 않아서였다.”

2012년과 2013년, 두 해에 걸쳐 서울 LG아트센터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사이클을 진행한 이후 명곡을 재해석하는 연주자 영역을 뛰어넘어 ‘건반 위의 건축가’ 칭호를 듣게 된 김선욱은 이번 영화작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음악 안에서 난 감독이 아니라 배우의 역할을 많이 하는데 음악과 영화의 메카니즘은 다른 것 같다. 결과물로서 영화는 바꿀 수 없고 영원히 남는다. 반면 음악은 한번 연주하면 소멸해버린다. 음악이 이만큼의 예술이라면, 영화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장비, 홍보 등 그 외의 것들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규모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규모의 콜라보를 하고 싶진 않다. 대신 음악을 자연의 소리와 맞춰서 연주를 한다거나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처럼 새로운 상상력과 감흥을 청중에게 줄 수 있는 음악 본연을 위한 프로젝트, 공생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는 관심이 많다.”

 

 

에필로그.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졸업 후 영국 왕립음악원 석사 과정에서 피아노가 아닌 지휘를 전공한 김선욱의 마에스트로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계는 정명훈의 뒤를 이어 또 한 명의 걸출한 피아니스트 출신 지휘자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였다. “일정이 구체적으로 정해지진 않았지만 영국 내 한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를 맡게 됐다”고 귀띔했다. 런던에서의 일상에 대해서는 “아내는 육아에 매달리고 나는 연주와 연습에 매달리는 중”이라고 소개했다.

사진 최교범(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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