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유리정원’이 안길을 드러냈다. 국내 여성 감독 최초로 칸과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신수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보기 드문 스토리, 감각적인 미장센의 힘을 입증했다.

 

 

‘유리정원’은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던 과학도 재연(문근영)이 후배에게 연구 아이템과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후, 어릴적 살았던 숲 속의 유리정원 안으로 숨어 들어간 이야기를 그린다. 무명 작가 지훈(김태훈)은 재연이 이사 간 방에서 그녀의 비밀을 엿보게 되고, 유리정원까지 찾아가 재연의 일상을 소설로 담기 시작한다.

영화는 소설과 현실을 넘나드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숲에서 태어난 그녀의 뼈는 단단한 나무, 육체는 부드럽고 하얀 섬유질이며 혈관에는 초록의 피가 흐른다. 재연을 모티브 삼아 지훈이 집필한 베스트셀러 작품 속 동명이인 주인공에 대한 묘사다. 지훈이 상상 속에서 그려내는 재연은 나무가 될 꿈을 안고 살아가는 야심찬 여인이지만, 이와 다르게 현실에 존재하는 재연은 배신, 그리고 왜곡된 욕망으로 인해 무너져버린 삶을 살고 있다.

 

 

순수하고 올곧던 그녀의 신념은 결국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되고 만다. 연거푸 “내가 맞았다”고 확신하는 재연의 목소리는 빼앗긴 연구 주제를 향한 집착으로 번들거린다.

무시무시한 미제 사건의 주인공이 됐음에도 재연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이유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느낀 관객의 공감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신수원 감독의 바람처럼 영화는 타인의 욕망으로 인해 삶이 파괴된 사람들을 위로하며 관객에게 일정 부분 힐링을 선사한다.

급성 구획 증후군 투병으로 연기 활동을 잠시 중단했던 문근영의 컴백작이다. 대사보다 눈빛으로 연기하는 장면이 많은 영화에서 그는 18년차 배우의 내공을 발휘한다. 신체 기형으로부터 비롯된 묘한 패배의식이 깔려있는 건 물론, 신념을 지키고자 내렸던 선택으로 인한 혼란, 내면의 붕괴를 무리없이 소화한다.

악역 연기에서 빛을 발하곤 했던 김태훈은 극 전개의 주축을 담당한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재연에 공감하는 지훈이 성공을 목전에 두고 번뇌하는 모습은 매우 사실적이다. 하지만 욕망을 우선시하다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진부한 캐릭터 설정으로 인해 매력을 반감시킨다.

 

 

‘유리정원’이 품은 또 하나의 미덕은 판타지 스토리에 걸맞은 감각적인 미장센이다. 재연이 모노톤의 도시를 떠나 숲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생동감 넘치는 초록빛 향연이 펼쳐진다. 동화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을 안겨주며, 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와 한 폭의 그림 같은 숲은 안구정화를 해준다. 강원도부터 제주까지 전국을 누비며 보석 같은 장소를 물색한 끝에 몽환적인 미지의 숲을 연출해냈다.

아름다운 풍광과 대비되는 안타까운 스토리는 판타지적 결말로 아련함을 남긴다. 하지만 환상적인 비주얼에 비해 임팩트 없이 단조로운 대사, 다소 급진적인 전개는 아쉬운 대목이다. 강동원 주연의 판타지 로맨스 '가려진 시간'이 저조한 흥행 성적을 남겼듯 유독 이런 장르물에 깐깐한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러닝타임 116분, 12세 이상 관람가,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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