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진흙 속에 묻혀있던 진주들이 캐내진다. 조만간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힐 별로 떠오를 재목을 발견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올해 BIFF에선 단연 김가희(25)를 꼽을 만하다. 주단 위에서 눈부신 여배우가 아니라 독보적 존재감으로 스크린을 우직하게 지배하는 퀸이기 때문이다. 인파로 가득한 해운대 영화의전당 비프힐에서 그녀와 만났다.

 

 

장편 ‘박화영’(한국영화의 오늘-비전)과 단편 ‘처녀비행’(와이드앵글)이 동시에 초청받아 난생 처음 BIFF 현장을 찾은 얼굴 위로 설렘과 의지가 뭉개뭉개 피어올랐다.

“작년에 찍은 영화 2편이 모두 부산에 됐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한편 어벙벙해요. 실감이 안나요. 2편 다 처음 공개되는 거라 아직은 관객들 반응을 몰라서 더욱 그래요.”

18살 여고생 박화영은 홀로 지내는 집이 있다. 뚱뚱하고 못생긴 화영은 친구들에게 그 집을 아지트로 제공하며 그들로부터 ‘엄마’로 불린다. 자신의 친엄마한테는 욕설을 퍼부으며 돈을 내놓으라고 패악을 부리지만 ‘엄마’라고 칭얼대는 또래 아이들한테는 “니넨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며 희생적인 엄마 역할을 자청한다. 화영은 특히 아이들 중 걸그룹 연습생인 미정(강민아)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는다.

‘꿈의 제인’에서 짧게 출연했던 그가 ‘박화영’에서 마침내 주연을 꿰찼다. 한국영화 사상 접해본 적 없는 캐릭터인 만큼 심신이 고달팠다. 영화를 보면 자동소총처럼 발사되는 거친 욕설과 줄담배, 원판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육중한 몸매에 화들짝 놀랄 지도 모르겠다. 또한 박화영과 아이들, 박화영과 엄마의 기형적 관계에 통증을 느끼게 된다.

 

 

“누구나 외로움은 가지고 있겠지만 박화영은 그 외로움을 해소하는 법을 몰라서 발버둥치는 소녀예요. 고등학생들의 눈을 못 보는 제가 고교생 무리에 어울려 욕을 하라고 했을 때 죽겠더라고요. 가끔 화날 때 한마디 하는 정도인데 방언 터지듯이 욕을 해대니...몸무게는 15kg을 늘렸어요. 감독님, 배우들과 합숙하면서 술도 마시고 라면 등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었어요. 처음엔 위와 장이 아팠는데 놀랍도록 위가 늘어가더라고요. 나중엔 라면 2개를 먹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이환 감독의 주문은 10kg 증량이었는데 김가희가 스스로 멈추질 못해서 5kg는 추가로 찌웠다. 어느 날, 치킨하고 밥을 동시에 먹는 자신을 보고 화들짝 놀라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부터 박화영처럼 먹는 거에 의지하더라고요. 담배 피우는 것도 힘들었고요. 오늘 어려운 거를 찍으면 다음날 보면 더 힘든 신이 있고의 연속이었어요. 그렇게 31회차를 촬영하다보니 끝이 나 있었어요. 고통스러웠지만 배우로서 견고해지는 계기가 됐죠.”

박화영은 관계에 있어 다층적이다. 아이들 무리의 리더 영재(이재균)의 폭력엔 1의 저항도 없이 몸으로 감수한다. 친엄마나 싹수없는 아이들은 무섭게 드잡는다. 미정에겐 한없이 너그럽다. 골목길에서 경찰과 대거리를 치는 장면에선 만취한 아저씨 필이 팍팍 느껴진다. 이토록 기이한 인물을, 데일 것만 뜨거운 이야기를 김가희는 악착같이 표현해낸다.

 

 

“박화영에게 있어 모든 행동의 시초는 자신을 버린 엄마예요. 감독님과 하루에 2시간씩 대화를 나누다보니 까먹었던 과거 이야기까지 생각이 났고,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어요. 레퍼런스 영화로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는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고요. 원래 활발한 성격에 체격도 있어서 유쾌한 캐릭터만 했거든요.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정적인 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요. ‘박화영’을 하면서 한도 풀고, 장면 하나에도 타협하지 않는 욕심을 채웠으니 하길 잘했죠. 행동도 많이 신중해졌고요.”

판타지 영화 ‘처녀비행’(감독 한승주)은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다. 김가희는 가희 역할을 맡았다.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고백조차 못하는 순하고 소극적인 여학생이다. 그러다 아버지가 주워온 골동품을 발견하면서 마법에 걸리게 된다. 박화영과는 극과 극인 캐릭터다.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춤이랑 노래로 주인공의 심리를 표현해야 하는 어려운 영화였죠. 이 영화는 너무 더워서 힘들었고, ‘박화영’은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한겨울 추위와 싸워가며 촬영해서 힘들었어요.”

서울에서 태어난 뒤 인천에서 성장한 김가희는 고교시절 ‘연극영화과’를 알게 돼 대입을 위해 연기를 시작했다. 안타깝게 대학에 떨어진 뒤 인천지역 극단에 입단해 연극배우로 첫발을 내디뎠다. 첫 주연작은 ‘홍당무’에서의 홍당무 역할이었다. 이후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며 ‘필름메이커스’의 단편영화에 빈번히 출연했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질 못해서 다채로운 경험을 쌓은 다음 크게 올라가고 싶었어요. 연극을 통해서 인물 분석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고, 신체를 사용한 표현법도 연마했으니 연기교실이었던 셈이죠. 앞으로 강인한 잔 다르크 같은 여성상을 연기해 보고파요. 액션신도 소화하는 여배우이고 싶죠. 치정멜로는 소망이랍니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현실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요.”

꽃길만 걸을 것 같은데 걱정이 한두름이다. 욕 잘하고 강인한 캐릭터로 굳혀질까봐서다. 그래도 차라리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여리여리’보다 '강인함과 개성'이 좋단다.

순둥이처럼 생긴 여배우는 열심히 운동과 다이어트를 병행하면서 23kg을 감량했다. “한순간 멋있는 모습으로 관객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고 싶어서”란 이유를 댄다. BIFF 개막식 때 그는 감독, 배우와 함께 정장 수트를 맞춰 입고 레드카펫을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배우 김가희'라는 장내 소개 멘트를 즐기며.

 

사진 최교범(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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