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섹션을 통해 첫 공개된 ‘황제’는 12일 개막식부터 19일 마지막 상영까지 남달랐다. 민병훈 감독은 개막식 레드카펫에서 손팻말 “니가 가라”와 한 개의 사과로 서병수 부산시장의 '사과'를 요구했다. 자율성과 독립성이 훼손된 영화제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퍼포먼스였다.

 

 

‘황제’로 영화에 첫 출연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고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을 기리는 인상 깊은 추모 연주를 이어갔고 14일 저녁 해운대 비프빌리지 야외무대에서 열린 토크 콘서트와 달맞이고개의 카페에서 마련된 ‘황제의 밤’에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 ‘월광’의 가장 열정적인 악장을 연주해 관객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적셔줬다.

역대 BIFF에서 유례없던 행보를 이어온 민병훈 제작자 겸 감독을 만났다. “‘황제’를 통해 상처 받은 사람들, 그리고 상처받은 영화제가 영화와 음악을 통해 치유될 수 있는 힘을 얻기를 바랐다”는 일성을 타건했다.

‘황제’의 극장 상영을 포기한 대신 찾아가는 영화관 형태의 상영을 밝히기 위한 ‘황제의 밤’ 행사에는 기자와 후원자들, 화가 김남표, 조각가 지용호, 가수 겸 화가 솔비 등 아티스트들이 몰려 뜨거운 열기를 지폈다.

그는 “스크린 독과점이 만연한 현실에서 극장을 포기해야 ‘황제’ 같은 영화가 살아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신 대학, 기업, 단체, 개인 등 ‘황제’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에게 직접 찾아가 상영하는 새로운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며 취지를 설명했다.

 

 

‘황제’는 우울과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 스스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려던 청춘들 앞에 마음을 울리는 피아노 선율이 기적처럼 울려 퍼지며 위로와 사랑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총 4차례의 시사 이후 GV(관객과의 대화)에선 열띤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젖어드는 분위기였어요. 처음 이런 영화를 접했다, 숨죽여서 영화를 봤다, 음악을 통해 치유 받았다, 숭고하다란 말들이 있었고 우시는 관객들도 많았어요. 예술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을 온전히 느끼신 듯해요. 저희 영화가 독창적이면서 엄숙함이 공존해서인지 질문보다는 감상을 많이 말해 주시더라고요. 선욱씨의 경우 연기를 잘한 게 아니라 진실하게 자신의 모습을 영화 속에, 연주와 음악에 담아냈어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서 오히려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이상훈 감독과 공동 연출한 영화는 민 감독의 이전 작품들보다 더욱 탄탄해졌다. 묵직한 주제의식이 흐르는 가운데 세월호의 소녀까지 담겨 눈길을 붙들었다.

“아이들한테 음악으로 작별인사를 해주고 싶었어요. 세월호와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치유의 메시지가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고요. 음악이 너무 좋아서 감정의 치유를 받았던 듯해요. 좋아해주셔서 다행이죠. 이번에 부산영화제가 득템한 거죠. 하하. 김선욱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연주와 무대를 마련해줬으니까요.”

 

 

저예산 예술영화를 줄곧 만들어온 민 감독에게 ‘황제’는 어떤 의미에선 외도에 가깝다. 2년에 걸쳐 촬영이 이뤄졌으며 한국뿐만 아니라 영국, 이탈리아, 헝가리 등 유럽 로케이션을 진행했다. 제작비만 해도 그가 이제까지 만들어온 영화 가운데 역대 최고액이다. 오락적 요소로 가득 찬 상업영화가 아님에도 왜 이런 무리수(?)를 감행했을까.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고통과 좌절 속에 있던 시기, 우연히 들른 공연장에서 김선욱이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듣고 치유를 받았기 때문이었어요. 각자의 사연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을 치유해주고 위로해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죠. 유기농으로 만든 영화예요. 조미료 치지 않고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작품이고요. 시대의 산소텐트가 될 수 있는.”

가장 화제가 됐던 대목은 2006년 세계적 권위의 리즈 국제피아노콩쿠르 우승자이며 한국 클래식계를 대표하는 ‘젊은 거장’ 김선욱이 배우로 출연한다는 거였다. 그의 섭외부터 촬영, 부산국제영화제 참석까지 모든 게 화제였다. 웬만한 신뢰관계가 아니면 이뤄질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동석한 김선욱은 “감독님의 아티스트 프로젝트를 몇 편 봤는데 예술가의 기를 영화에 담아내는 게 인상적이었다”며 “일반적이지 않은 시도지만 감독님이 영화를 하시는 목적에 부합하는 프로젝트라 생각했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극중 김선욱씨 연주의 아우라와 공기의 흐름이 힘겨운 내 감정의 상태와 통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호응하는 거다. 그건 김선욱이니까 가능한 거다. 그는 전문 배우가 아니므로 주문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고유성을 영화적으로 관철시키는 게 관건이었다. 같은 예술가여서인지 질문을 많이 하거나 이유를 따질 필요도 없더라. 감독으로서 난 그가 만든 음악을 주워 담으면 됐다. 날로 먹을 순 없기에 숲, 들판, 폐허 등 공간을 조성하고, 그가 충분히 즐기도록 만들어주면 됐다. 다만 뮤직비디오가 아니기에 음악에 맞춰 배경을 맞추고, 곡들의 연결을 촘촘하게 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대부분의 영화인들 그리고 시네필들이 궁금해 하는 ‘황제’의 향후 상영방식에 대해 물었다.

“저희 영화를 필요로 하는 분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상영할 거고 역으로 저희가 신청을 할 수도 있겠죠. 극장을 포기하는 순간 자유를 얻어요. 거기에 몰입할 이유가 없어요. 자유스러운 게 좋지 않나요. 필요한 분들에게 보여주는 게 중요한 거죠. 환경이야 내가 만들면 되니까. 자존감이 있는 영화이니 상영방식도 자존감 있게 해 나가려고요.”

그는 상품이 아닌 생명체를 다루듯이 보여주고 관객과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극장에 방치하듯 하면 감독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부연했다. 김선욱은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면 누군가는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해야한다”며 “감독님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 최교범(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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