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9번째 부산국제영화제 방문이다. 하지만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의 방문은 처음이다. 전주국제영화제는 단편영화 감독으로 참가한 적이 있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초청받아 격한 반향을 일으킨 ‘박화영’의 감독 이환(38)과 해운대 영화의전당 비프힐 야외 테이블에서 토크를 벌였다.

 

 

“배우로 부산을 찾다가 첫 장편 연출작으로 오게 돼 감회가 새롭다. 감동이 밀려든다.”고 말문을 열었다. ‘박화영’은 기형적인 관계의 이야기이자 지독한 성장영화다. 18세 박화영이 엄마에게 버려진 뒤 소위 불량 청소년들의 아지트에서 그들의 ‘엄마’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똥파리’에서 여고생 연희(김꽃비)의 왕처럼 군림하는 남동생 영재로 깊은 인상을 남긴 뒤 ‘마이 리틀 히어로’ ‘암살’ ‘밀정’ 등에 출연했다. 유순한 역할을 주로 맡다가 최근엔 연이어 독립군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감독 겸 배우인 양익준의 영향, 실연의 아픔을 털어버리고자 했던 사심이 기폭제 역할을 하며 감독 데뷔했다. 헤어진 여친의 집을 밤에 술 먹고 친구와 함께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일명 골목길 멜로 로드무비 ‘지랄’(2011)이 첫 연출작이다. 2013년 두 번째 단편영화 ‘집’을 연출했다. 18세 소녀 상희가 집에서 강제로 독립 당한 뒤 학교마저 가지 않은 채 혼자 사는 공간에 친구들이 모여드는 이야기다. ‘박화영’의 프리뷰 격이 되는 작품이다.

“‘집’을 발전시킨 게 ‘박화영’이다.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주인공을 친구들은 이용을 한다. 중학교 때 그리고 고교시절에 이런 친구를 본 적이 있다. 김민주라는 여배우가 있는데 그에게 시나리오를 선물해주고 싶어서 ‘집’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를 극중 상희가 특별하게 아끼는 친구 미정 캐릭터의 모델로 삼았다.

 

 

‘집’을 장편으로 발전시키면서 집 근처인 태릉 길거리에서 난동부리는 사람들을 보고 ‘저들은 왜 저럴까’ ‘우리는 왜 피하려 하고 관심을 갖지 않을까’란 생각이 떠올랐다. 중고교시절 경험을 합쳐서 10대의 눈으로 바라본 성장영화를 만들게 됐다.”

원작의 주연 여배우 김가희를 또 다시 캐스팅할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8개월의 오디션 기간 동안 지원자들은 박화영 캐릭터를 에너지 넘치고 세게만 표현하려 들었다. 아이러니함이 없기에 인간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나질 않았다.

“배우 김가희의 엉뚱함, 고유의 이미지가 박화영과 잘 맞아서 결국 캐스팅을 하게 됐다. 물론 처음에 대본을 보더니 깜짝 놀라더니 못하겠다고 하더라. 살벌한 욕설, 줄담배, 거구의 몸집 등이 설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촬영을 준비하며 배우들과 경기도 파주 명필름 기숙사에서 3개월간 합숙을 했는데 가희가 점점 박화영에 스며들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그의 경험담, 김가희란 배우의 존재감으로 인해 영화는 살 떨릴 정도로 리얼하고 거칠다. 그러면서 원시적 에너지가 넘실댄다. 감독으로서 그의 화두는 ‘성장’이다. ‘집’과 ‘박화영’이 그랬고 앞으로 연출할 작품들도 이런 메시지를 담아갈 계획이다.

 

 

“사람과 성장에 관심이 많다. 누구나 10대, 20대, 30대 모두 나이에 걸맞은 성장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게 사람을 말하는 듯하다. 성장 안에는 패배의식, 욕망 등 모든 게 존재한다. 그런 감정을 오밀조밀 수집해서 다뤄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다. ‘박화영’도 10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인간의 성장 그리고 가족, 친구와의 관계를 기형적으로 써내려가고 싶었다. 단지 이를 10대의 눈으로 바라봤을 뿐이다.”

극중 걸그룹 멤버이자 아지트에 출몰하며 ‘엄마’ 박화영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윤미정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화영을 따르는 듯 싶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철저히 이용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 무리 중 가장 정상적인 인물이다. 누구나 손해보고 싶어 하지 않고, 위험하거나 껄끄러운 상황을 모면하려든다.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이 기형적으로 다가오는데 불가해한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현대사회 자체가 기형적인 게 아닐까.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무관심, 방치라고 본다. 관계가 있기에 태도가 형성되고 거기서 이질적인 것들이 생기지 않을까. 박화영도 엄마한테 사랑을 못 받았던 친구가 친구들한테 ‘엄마’라고 불리면서 자신이 엄마가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극단적인 캐릭터다.”

대학(대진대 연극과) 시절엔 연기와 시나리오 수업은 들었지만 연출에 큰 관심은 없었다. 배우로서 커리어를 쌓아나가다가 감독의 세계에 뛰어든 이유는 한국영화계의 신흥 세력으로 부상한 2030세대 배우 겸 감독들(구교환 남연우 정가영 등)과 비슷하다.

 

 

“배우로서 하고 싶거나 맡지 못하는 캐릭터를 내가 직접 연기하거나, 배우를 통해 구현해 보려는 일종의 욕망 해소 방법이다. 재미있는 건 자기만의 연기 스타일이 연출에도 반영이 된다. 영화제 동기들인 구교환 남연우 등과는 워낙 친해져 서로 시나리오를 돌려보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재기발랄한 연출 스타일의 구교환과 거칠고 무거운 나의 딱 중간 지점에 남연우가 있다.”

본인 역시 배우다 보니 촬영 현장에서 캐스팅된 배우들을 ‘동료’라고 여긴다. 전업 감독과 가장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배우들이 눈치 보지 않고 자기표현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감독인 나의 역할이지 싶다. ‘박화영’을 하면서도 내 경험을 들려주면서 이해를 많이 구했던 듯하다. 제일 중요한 게 배우와의 소통이다. 특히 20대 때 배우들은 욕망이 많다. 액티브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할 하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별반 없다. 예전엔 ‘여고괴담’과 같은 영화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부재하다. ‘박화영’이 젊고 신선한 얼굴들이 대거 등장하는 기회가 됐으면 했다.”

차기작으로 20대 성장영화 ‘영동시장’의 시나리오를 완성해 놨다. 부산영상위원회 인큐베이팅 작품으로 선정됐다.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시청하다가 모티프를 얻은 군산 기지촌 이야기도 구상 중이다. 여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여성영화다. 배우답게 캐릭터 영화에 욕심이 많다. '한국영화의 오늘'을 책임진 그의 '비전'이기도 하다.

 

사진 최교범(라운드테이블)

 

 

저작권자 © 싱글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