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소나타에서 피아니스트는 단순히 반주자의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동반자로서 함께 사유하고 연주한다. 이런 정의를 훌쩍 뛰어넘어 불꽃 이는 ‘밀당’과 황홀한 ‘하모니’를 보여준 장면을, 두 연주자를 목도했다.

20세기 클래식 음악계를 지배했던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와 ‘젊은 거장’ 김선욱의 듀오 리사이틀이 19일 오후 8시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우수와 사색의 아이콘이자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1~3번 전곡 연주로 팬데믹 시대 청충을 초대했다. 당초 지난 12월 계획됐으나 코로나19 탓에 이날로 연기됐다. 2좌석 거리두기가 시행된 공연장 내 4면의 객석은 만석이었다.

물빛 드레스로 단장한 70대 바이올리니스트, 블랙 수트로 성장한 30대 피아니스트는 분명 세대와 개성을 달리하는 연주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합을 맞춰 꾸민 무대를 관통한 정서는 여유로움과 안정감이었다. 대가다운 해석과 테크닉에서 기인한 것일 터다.

소나타 1번은 가곡 '비의 노래'와 관련된 작품으로, 서정적인 표현력과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리듬감이 중요하다. 정경화의 바이올린이 선율의 아름다움에 집중했다면 김선욱의 피아노는 비의 리듬을 명징하게 드러내며 흥미로운 앙상블을 이뤘다.

정경화는 저음 현을 많이 활용한 핑거링(운지법)으로 브람스 음악에 어울리는 우수에 찬 음색을 구사했고, 중저음을 충실하게 담아낸 김선욱의 플레이는 브람스 음악의 진중함과 무게감을 밀도 있게 전했다.

행복감 넘치는 분위기의 소나타 2번에서 정경화는 활은 더욱 자유롭게 움직이며 아름다운 연주로 관객의 귀를 사로잡았다. 김선욱은 음 하나하나의 명확성과 미묘한 뉘앙스까지 살려 연주했다.

앞선 두 곡과 달리 단조로 쓰여진 드라마틱한 3번에서 정경화-김선욱의 불꽃 튀는 호흡과 열정적 연주는 일품이었다. 마지막 4악장에서는 폭발적인 연주가 터져나와 마치 풀편성 오케스트라 연주 못지않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특히 김선욱은 정제와 감정의 간극을 능란하게 넘나들며 브람스의 어두운 면을 탁월하게 살려냈다.

이날 김선욱은 주역을 서포팅하는 조연의 롤에 스스로를 포지셔닝하는 게 아니라 섬세하면서도 과감한 자신의 해석을 적극 담아냈다.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란 별칭에서 드러나듯 독일 작곡가들의 레퍼토리에 강한 그의 기량이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왜 이 공연의 타이틀이 '듀오'였는지를 여실히 웅변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클래식 아티스트 정경화의 연주에서는 20~30대 시절 날카롭고 치열한, 마녀와 같던 면모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자리를 연륜이 선물한 편안함과 여유로움으로 채웠다. 그가 터치한 브람스는 ‘고독한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행복을 꿈꿨던 황혼의 인간’이었고, 그런 점에서 설득력이 있었으며 울림이 존재했다.

공연이 끝난 뒤 청중들의 박수와 환호가 끝없이 이어졌고, 오랜만의 대면 무대에 작심(?)하고 나온 듯 정경화-김선욱 페어는 즉각 앙코르 곡을 연주했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연주된 이후 대중들의 FM방송 리퀘스트 곡으로 친숙해진 브람스 'F.A.E 바이올린 소나타' 3악장 스케르초를 들려준데 이어 정경화의 시그니처 곡인 엘가 ‘사랑의 인사’로 마침표를 찍었다. 무대를 떠나기 직전 정경화는 동서남북 객석을 향해 만면 가득 웃음을 지으며 크게 손하트를 보냈다.

사진= 빈체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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