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물었다.

“왜 순천으로 여행을 왔어요?”

나는 조용히 모자를 벗고 완전히 밀어버린 머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선암사에 가려구요. 이젠 괴로운 속세를 떠나 출가를 할까 합니다.”

불면증

며칠째 잠을 못 자고 있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 겨우 세 시간 정도를 자고 일어나도 다시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이 오지 않는다.

머릿속엔 영사기가 돌아간다. 작동을 멈추는 방법은 모른다. 그래서 계속해서 돌아간다. 상영되는 영화는 즐겁고 행복한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그 결말은 날 괴롭게 하는 새드엔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아서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지만 어느새 다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비극이 며칠째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반복된다.

지난 움 8월호의 싱글샷 아메리칼럼 <필자가 고백할 것이 있다>를 보면, 마음이 복잡할 땐 그저 비겁하게 떠나라고 한다. 무언가를 깨닫고 마음 가득 열정을 얻어온다는 개소리는 하지 말고 그저 도망가기 위해 도망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떠난다. 미련을 버리고 감정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한 다음날 바로 떠나는 갑작스런 여행이다. 최종 목적지는 전라도 순천 선암사.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그냥 떠난다.

대천휴게소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속도를 줄이고 어디론가 들어간다. 겨울 평일 오전의 한 휴게소. 여름 휴가철 북적북적한 풍경과는 다르게 아주 한산하다. 피곤해 보이는 기사 아저씨가 15분간 휴식이라며 버스의 문을 연다. 몸을 일으켜 버스에서 내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홀로 휴게소 의자에 앉아 찬 바람을 맞으며 호도과자를 주섬주섬 먹고 있자니 쓸쓸하다. 앞으로 펼쳐진 쓸쓸한 여정의 서막인가. 먹다 남은 호도과자 봉지를 들고 터벅터벅 버스로 돌아간다. 버스에 올라타니 모든 사람들이 자고 있다. 이번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엔 나도 저렇게 세상 돌아가는 줄 모르고 잠들어 있을까?

고창 선운사

선운사에 갔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른다. 함박눈 내리던 어느 조용한 겨울날이었고, 동백꽃을 보기 위해 눈을 맞으면서도 소복하게 쌓인 눈길을 뽀드득 밟으며 걸었다. 그리고 도착한 대웅전 뒤의 동백나무 숲엔 동백꽃들이 흰 눈에 대비되어 더 붉고 예쁘게 가득 피어있었다. 그 순간은 한 장의 사진이 되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선운사로 향한다.

고창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바로 선운사로 가는 버스를 탄다. 출발 시간이 되었지만 아무도 타지 않는다. 어떤 아저씨가 버스에 올랐지만 광주로 가는 버스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 내린다. 결국 큰 버스에 승객은 나 혼자뿐. 큰 택시를 타고 가는 기분이다.

선운사 정류장에 내려서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는 한두 사람이 간혹 보이긴 했지만 들어가는 사람은 나 뿐이다. 저녁 다섯 시. 이미 늦은 시간이기 때문일까. 큰 절에 사람이 너무 없다. 사람이 없으면 조용해서 좋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무척 쓸쓸해진다. 대웅전 뒤 동백꽃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없다. 이미 다 져버린 듯하다. 선운사는 추억 속의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간직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든다.

고창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삼십 분 동안 정류장 주변을 괜히 서성거린다. 쓸쓸함이 극대화되는 시간이다. 기분이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울적해진다. 하지만 기분이 이렇게 바닥을 찍는다면 이젠 다시 반등하게 되지 않을까? 이제 겨우 여행 첫 날이니까.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죽녹원

담양 죽녹원

아침 일찍 일어나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담양으로 향한다. 죽녹원에 가는 거라면 담양터미널에서 내리지 말고 죽녹원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는 기사 아저씨의 말에도 불구하고 굳이 담양터미널에서 내린다. 우선 아침을 먹고 싶지만 아침 여덟 시에 열려있는 식당을 찾기가 어렵다. 걸어가다 보면 식당이 나올까 싶어 천천히 담양 읍내를 걸어 죽녹원까지 간다. 사실 그냥 걷고 싶다.

죽녹원에 들어가자 약간은 춥다 싶을 정도로 서늘한데 기분은 상쾌해진다. 대나무에서 나오는 음이온이 사람을 차분하게 하고 기분을 좋게 한다고 써있는데,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더구나 아침이라 그런지 아직 방문객들이 적어서 조용하다. 조용히 숲길을 걷는 것 자체가 좋다. 집 뒤에도 이런 숲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이이남아트센터

대나무 숲 사이에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이이남 아트센터라는 갤러리다. 입간판에 써있는 댓잎누텔라 아이스크림을 엄청 먹어보고 싶어 들어갔지만 여름에나 출시된다고 한다. 그냥 댓잎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밖에. 댓잎누텔라 아이스크림을 먹지는 못했지만 이 곳에 전시된 작품들을 볼 수 있어 소중한 시간이었다. 작품들을 재미있게 감상하다보니 아이스크림은 생각나지 않는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 크지 않은 숲이지만 모든 길을 구석구석 천천히 걷자면 시간이 꽤 걸린다. 그래도 그럴 가치가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기분이 좋아진 곳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또 와야겠다. 그 땐 메타세쿼이아길도 걸어봐야지.

출처 = http://magazinewoom.com/?p=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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