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늦덕의 행복과 불행이 공존하는 덕질 일기, 가슴이 오덕오덕

“바보야, 옥션대행 사이트를 써야지!”

친구가 옛다 식으로 던져준 주소는 입찰을 대신해주는 대행 서비스 사이트였다. 옥션 대행 사이트에 가입하자, 악질적인 수문장 한 명을 깨부시고 덕후 레벨이 승급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가입하니까 어서 오시라며 5000원 쿠폰도 주네? 이게 웬 떡이람. 옥션 대행 가격도 배송대행과 비슷하겠거니 생각하고 딱히 확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안일함이 추후 불행을 가져다줄 것이란 사실도 모르는 채, 나는 옥션 대행의 세계에 발을 딛었다.

경매는 6일 뒤에 끝나지만, 나는 “이 피규어 내꺼”라고 의사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단 3600엔에 입찰을 했다. 이와 함께 자동입찰은 8000엔까지 설정했다. 충분히 지불할 의향이 생기는 정도의 금액을 설정해놓으면, 또 다른 입찰자가 나타나더라도 설정 금액까지 자동적으로 입찰이 되는 기능이다. 그래. 8000엔이면 원래 가격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고, 피규어 하나에 8000엔이면 그다지 비싼 편도 아니었다. 물총 하루카, 넌 내꺼야. 제 멋대로 안심한 나는 6일 동안 두 다리를 뻗고 잠에 취했다.

 

에디터가 갈망한 하루카의 물총 피규어

 

그리고 나는 그 6일 동안, 경매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피규어는 이미 내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매가 끝나는 날 날아온 문자 한통이 내가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일깨웠다.

[입찰하신 경매의 최고가가 갱신되었습니다. 다시 입찰해주세요 블라블라...]

...온몸을 돌고있는 피가 차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사이트에 들어갔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또 경매에 참전했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었다. 경매 종료 10분 전, 가격은 8500엔까지 올라 있었다. 미친... 욕지기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나는 짜증을 억누르고 8750엔으로 가격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또 띠링~하고 문자가 도착했다. 입찰하신 경매의 최고가가 갱신되었습니다. 다시 입찰해주세요.

현재 가격 9000엔.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카페에 있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울부짖어야 했다. 섬녀들아... 제발...... 내게 양보해줘....... 다시 한번 입찰을 눌렀다. 9250엔. 난데없이 벌어진 한일전에 경쟁심보다는 간절함이 솟구쳤다. 하지만 현지 덕후들은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제발... 이제 그만해... 입찰가를 사이좋게 한 번씩 올리는 사이 어느새 가격은 10만엔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경매 종료 30초 전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나는 다시 입찰을 하기 위해 정신력을 끌어모아 재빨리 새로고침을 눌렀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내 숨통을 쥐어왔다. 평소엔 잘만 터지던 스타벅X 와이파이 속도가 갑자기 엄청나게 느려진 것이다.

“아...!!”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까지 영겁의 시간이 흘렀다. 입찰 완료. 입찰 건수 50. 입찰 가격은 1만 2500엔. 그리고 입찰한 유저의 ID는...내 것이 아니다. 내 아이디가 아니었다. 물총 하루카는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하루카는 이름 모를, 어느 일본 여성... 혹은 일본 남성의 품으로 날아갈 것이었다. 굳이 넓은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이틀 내에 자신의 새 주인을 만날 것이었다.

“아아... 아아......”

첫 참전이었으나, 그래도 패배의 아픔은 무척이나 쓰라리기만 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패배를 인정하려 노력했다. 그래. 처음이잖아...? 괜찮아. 다음에 또 물건이 올라올 거야! 하하, 2기가 방영된 지도 몇년이 지났고! 그래서 프리 덕후들도 많이 줄어들었고! 다른 애니로 갈아타면서 굿즈 처분하는 사람 하나 없겠어?! 금방 다른 게 올라올 거야!! 하하!!

햬루... 햬루야..........

탄식이 끊이질 않았다. 시름시름 앓으며 노트북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친구에게 전화했다. 나 졌어. 소주 따자... 중얼거리는 내 말에, 친구는 퍽 어이없다는 말투로 술도 못 먹는 게 어디서 청승이냐고 했다. 대꾸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친구가 내게 카톡으로 일본 옥션 주소 하나를 턱 던져주는 것이다.

“옥션에 하나 더 올라왔는데 이틀 뒤에 경매 종료야”

친구가 보내준 주소에 들어가 보니 또 다른 물총 하루카가 그 새초롬한 표정으로 화면 밖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피규어의 상태를 살폈다. 흠 하나 없이 말끔했다. 전화기에서 “근데 이건 특전이 없네”라고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 그러니까, 내가 경매에 참전했던 하루카 피규어는 특전이 부가적으로 딸려오는 것이었다. 그 특전은 새초롬한 하루카의 얼굴을 부드러운 미소로 바꿔 낄 수 있는 얼굴 부속품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렇게 섬녀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거구나!

특전이고 뭐고, 내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저 섹시한 피규어 하나 내 방 한구석에 세워두면 그걸로 됐다. 나는 다시 한번 옥션 대행 사이트에 로그인했다.

 

나나세 하루카(미래의 국가대표, 내 방 진열대에서 미모 뽐내시는 중)

그리고 나는 당연히! 하루카를 내 품안에 안았다. 당당하게, 경매에 낙찰돼서 승리를 거뒀다. 이번에도 마지막까지 나와 입찰 경쟁을 벌인 상대가 있었으나 그 사람은 어느 순간 경쟁을 포기했기 때문에 비교적 쉬이 낙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나는 ‘옥션 대행’ 사이트의 무시무시함에 대해 1도 모르는, 한낱 늦덕 나부랭이였을 뿐이었다. 내 늦덕 인생 두 번째의 시련은 옥션 대행업체를 사용하면서 찾아왔다. 그 시련은 매우 느릿느릿하고 잔혹하게 내 일상을 집어삼켰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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