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언저리 필운동 골목길 안 자그마한 한옥건물에 자리한 1인미용실 ‘아리아’. 요정이란 뜻의 우리말, 오페라 아리아란 의미를 모두 담은 이곳은 김인철 원장의 조용한 일터다. 금발로 염색한 50대 싱글남 김원장은 소중한 일 그리고 가족인 닥스훈트 5마리를 돌보느라 심심하거나 고독할 틈이 없다고 말문을 연다.

 

 

★ 英 비달사순 유학 1세대

대학에 입학해 술만 마시던 1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했다. 제대 후 어느 날, 명동의 유명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잘랐는데 4000원이었다. 대졸 초봉이 30만원대일 때였으니 직업으로서 괜찮겠다 싶었다. 미용학원에 입학하질 않고 헤알못(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작은 미용실 보조로 출발했다. 그러다 압구정동에 ‘헤어뉴스’가 오픈할 때 그곳에 들어가면서 미용에 대한 가치관이 확 바뀌었다.

“다른 헤어숍 오너들은 월말 회의 때 모두 돈 얘기를 하고 매출을 강요하는데 헤어뉴스 오너는 진로와 공부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미용실마다 자기네 기술이 오리지널이라고 주장하는데 찾아봤더니 의외로 영국에 있더라고요. 영국대사관과 영국문화원을 찾아가 상담을 했더니 비달사순, 토니앤가이, 알란 인터내셔널 등이 있는데 다들 비달사순을 추천했고요. 호기심이 저를 이끌어 1990년 100만원만 달랑 들고 영국으로 무작정 유학을 떠났죠.”

당시만 해도 세계적인 미용학교인 런던의 비달사순 스쿨 출신 한국인 미용사들이 없을 때라 맨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입학과정을 밟아나갔다. 학교 등록절차를 알아본 뒤 어학연수 과정만 확정해놓고 출국했다. 6개월의 과정이 끝날 무렵 비달사순 스쿨에 입학했다. 비기너 코스를 마친 뒤 다양한 코스를 거쳐 35주 과정의 디플로마 코스까지 수료하는데 2년이 걸렸다.

“전통과 시스템을 갖춘 곳이라 커트방법부터 다른 데와는 다르더라고요. 그땐 사순이 다섯 스테이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생활비가 떨어졌을 땐 차에다 짐을 다 실어놓은 채 친구들 집을 며칠씩 전전하기도 했는데 힘들기보다 새로운 걸 알아가는 재미가 대단했어요. 가까운 프랑스나 유럽여행은 해보지도 못했죠.”

 

 

★ 호기심이 이끈 헤어인생

비달사순에서 그가 얻은 최고의 배움은 ‘기본에의 충실’이었다. 헤어에서 커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득했다. 퍼머, 염색 등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했다. 덩달아 고지식함까지 같이 배우고 왔다. 미용업계에서 고지식함은 돈과는 대립하는 항목이다. 런던에서 돌아온 뒤 그는 “장사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런던에서 돌아온 뒤 헤어철학이 바뀌었죠. ‘정확하게 해야 한다’가 가장 중요해진 거죠. 고객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한다거나, 비즈니스도 못하겠더라고요. 대한민국 어느 미용실에 가도 다 좋은 제품들 사용한다고 하지만 안에서 보면 그러질 않아요. 장사하는 거죠. 손님이 왔을 때 굳이 안 해도 예쁜데 ‘파마할 때 됐죠?’라고 물어보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또 다시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차오르던 96년, 비달사순 스쿨에 마스터 과정이 생겨 톱 헤어 아티스트들로부터 배울 수 있기에 두 번째로 영국 유학을 떠났다. 그때부터 한국인들이 많이 입학하기 시작했다. 후배들을 위해 어학연수 과정, 스쿨 등록, 숙소 등을 알선해줬다. 5개월간의 유학을 다녀온 뒤 다시 헤어뉴스에서 매장 책임자로 근무한데 이어 청담동에서 헤어숍을 몇 군데 운영하는 동시에 뜻 맞는 디자이너들과 팀을 꾸려 같이 공부하고 동업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 1인미용실

그러다 게임회사, 출판사를 운영하는 지인들과의 협업을 지향하며 지난해 8월 강북의 옛스러운 동네에 소수의 고객을 대상으로 100% 예약제로 운영되는 1인미용실을 오픈했다. 공간과 도구, 제품을 깨끗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다 고객에게 집중해서 작업할 수 있는 게 최대 장점이다. 손님들 사이에서는 가차 없는 직설로 유명하다. “(머리) 다듬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이들에겐 “단골 미용실에 가서 하세요”라 말한다. 손님에게 어울리는 헤어 디자인을 하는 게 그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손님은 자기 얼굴 하나만 보고 머리 스타일을 정하지만 전문가는 전체를 볼 수 있거든요. 어떤 스타일이든지 어울리게 만들어놓으면 어울려요. 그런데 습관과 두려움, 유행을 좇느라 변화를 주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많죠. 전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라 스타일을 볼 수 있고 구현할 수 있잖아요. 제가 선택해서 그때그때 바꿔주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봐요.”

손님들에게 그는 작업 후 머리를 감고 대충 말려서 가라고 주문(?)하곤 한다. 꾸미거나 예쁘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다. ‘Wash & GO(감고 스타일링 할 필요 없이 그냥 나가라. 비달사순 샴푸 이름이기도 하다)란 말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디자인을 잘 해놓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 디자인해 놓은 것만큼은 살아나기 때문이다.

김원장이 계속 가위를 들고 있는 이유는 누군가의 머리를 만진다는 게 재미나서다. 원하는 걸 만들어냈을 때의 성취감 때문이다. 여건이 된다면 열정페이나 노동착취 없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서 디자이너다운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숍을 만들어보고 싶다.

 

 

★ 혼삶

성장과 성취를 중요시하는 이들에게 ‘결혼’은 장애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김원장 역시 마찬가지다. 일이 먼저였고, 커리어와 성장이 최고의 가치였다. 집안의 장손이었던 그는 과거엔 친인척이 모두 모이는 명절이 제일 싫었다. 지금은 부모님이 미국에 계시고, 닥스훈트 5마리(5마리는 노화와 질병으로 사망했다)와 중곡동의 단독주택 옥탑에 거주한다. 옥상이 80평이나 돼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어 이곳을 선택했다.

“한때는 휴가도 안가고 일했을 만큼 워커홀릭이었는데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라서 취미생활에 빠져들게 됐어요. 동호회 사람들과 바이크를 타고 다녔고, 또 다른 무리들과 주말이나 밤마다 전국 드라이브를 했죠. 저만 싱글이었는데 아무도 날 차별하거나 이상한 시선으로 보진 않았어요. 워낙 제가 까칠해서 그런 시선 따윈 개의치도 않지만."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게 도움이 되고 좋은 것일 수도 있으나 혼자 오래 살아왔기에 이젠 함께 지내는 게 어색하다. 불편함을 못 느끼는데 굳이 할 필요도 없다고 여긴다.

"요리는 내가 잘하지, 빨래는 세탁기가 하지, 굳이...혼자 살면 놀 거 많고 먹을 것도 많은데 왜 외롭지 싶어요. 외로우면 이성친구를 사귀면 되고요. 그런데 연애가 삶의 외로움을 해결해주진 않죠. 홀로일 노후를 위해 보험을 들어놨고, 아픈 건 잘 견디면 될 거 같다는 생각이다. 다만 금쪽같은 강아지들만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다 싶어요."

 

사진 최교범(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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