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6개월 만의 재회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서 일제강점기 당돌한 하녀 숙희로 단박에 눈에 들어왔던 김태리(27)가 이번엔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였던 ‘1987’년의 대학생 연희로 관객 품을 뜨겁게 파고든다. 버건디 컬러의 니트 스웨터를 입은 그의 단단한 심지와 환한 웃음은 여전했다.

 

 

‘1987’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의 4.3 호헌조치, 이한열 열사 사망과 직선제 개헌을 내건 6월 민주항쟁까지의 숨 가쁜 6개월을 담아낸다. 김태리는 교도관인 외삼촌(유해진)과 동네 슈퍼를 운영하는 홀어머니를 둔 연희로 등장한다.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만든 영화라 언론시사 후 뜨거운 반응에 기쁨이 밀려들어요.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구나, 다시금 확신이 들고요. 영화를 보고나서 울림도 좋았지만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장준환 감독님이 얼마나 많이 조심스러워 했고, 진심을 담으려 노력했는지가 보여 감동했어요.”

1990년생, 08학번인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들을 재현한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우려와 달리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구조와 이야기 진행방식, 속도감이 드라마틱하고 영화 같아서 이야기에 절로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영화적 코드와 재미가 잘 어우러진 작품이었어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캐릭터 분석하고, 감독님과 대화 많이 나누고, 부족한 부분은 찾아서 공부하며 다가갔죠. 장면별로 쪼개서 이 인물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지 분석하며 접근했고요. 실존인물을 연기한 선배님들에 비해 좀 더 자유롭게 나로부터 시작할 수 있었어요.”

 

 

연희는 고집스러우며 표현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다. 한편으론 자신의 여림, 약한 모습,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김태리는 풋풋하면서도 강단이 있는 평범한 인물에 빛과 그늘이란 색깔을 적절히 입혀낸다.

“박종철 열사님은 잘 몰랐지만 이한열 열사님은 사진으로 접한 적이 있는데다 6월항쟁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분이라 알고 있었어요. 이번에 작업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음을 알게 됐어요. 작년과 올해, 대한민국에 급격한 변화에 있었기에, 2017년에 불어 닥쳤던 열기가 남아 있기에 많은 이들이 그다지 멀지 않게 느끼진 않을 것 같아요.”

광장의 시민들을 포착한 영화의 엔딩장면은 그에게도 격한 감정을 일으킨 듯 보인다. 공교롭게 엔딩신 촬영을 가장 마지막에 했다.

“종교를 믿지 않지만 종교에 빠져드는 순간이 이러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동안 거부하고 귀를 닫고 있었던 세상이 ‘야 이거 봐, 내말이 맞잖아’ 하면서 모습을 드러내는? 매일 마주했던 시청광장이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뀌고, 사람들의 숫자와 함성은 어쩔 수 없이 희망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어요.”

VIP 시사 때 6월항쟁 당시 ‘그날이 오면’을 불렀던 대학생 합창단원들이 초대됐다. 그 때는 그들을 보며 가볍게 반응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나니 가슴이 아려왔다. 우리 중 누군가도 박종철·이한열 열사처럼 미래가 사라진 청춘이 될 수 있었을 거고, 그분들이 살아 있다면 웃고 떠들면서 영화 보러 왔을 텐데란 생각에 이르니 절로 가슴이 뭉클하고 슬펐다.

 

 

박찬욱 감독에 이어 장준환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연희 캐릭터가 많이 고됐음에도 지치지 않은 채 완주할 수 있었던 건 감독님 덕분이었다고 고백했다.

“감독님이 이끌고 손잡고 함께하셨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연희 캐릭터를 워낙 중요시 하셨다고 들었어요. 김태리라는 신인배우로부터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내야 하니까 열심히 해주셨어요. 즐겁고 감사한 마음이었어요.”

선배복도 많았다. 캐릭터 때문에 고민이 차올랐을 땐 유해진이 먼저 물어봐주고, 경험담을 얘기해줬다. 특유의 농담과 유머에 즐거웠다. ‘아가씨’에서도 공연했던 하정우는 여전히 재미있는 선배였다. 만화동아리 선배 역으로 특별출연한 강동원은 특별했다.

“동원 선배님은 (잘 생기셔서) 너무 연예인인데 가까이서 지켜보니까 장난기 많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계시더라고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선배님들로부터 자세나 태도, 장면을 해석하는 방법, 감독님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는지 등등 배울게 너무 많았던 거죠. 옆에서 자연스럽게 보고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극을 주도하는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애국이라면, 연희에게는 희망이 아닐까 여긴다. 그래서 ‘1987’이 실화가 줄 수 있는 도식적인 함정을 피해간 거 같단다. 특히 마지막에 연희가 슬픈 현실에 매몰되지 않은 채 ‘이거를 알아야 돼! 이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란 에너지를 느꼈을 것이란 해석을 덧붙인다.

 

 

‘아가씨’로 그해 각종 시상식에서 신인여우상을 휩쓸며 충무로의 대어급 신인으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언제까지 괴로워하면서 작업해야지”란 물음표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현실에서도 격동기다.

“연기를 하면서 드는 재미와 뿌듯함도 있지만, 그 순간에는 자기반성과 자책으로 허우적대요.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영화 안에서 작품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데 기여할 수 있을까, 영화가 원하는 대로 캐릭터를 운영할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는 거죠. 그런 괴로움은 예전보다 더 늘었어요. 돌이켜보면 연극할 때부터 작품마다 직업을 둘러싼 책임감과 즐거움을 두고 부단히 고민했어요. 아직 답은 못 찾았죠.”

지난 1월 개봉한 독립영화 ‘문영’으로 올해를 시작했고 27일 개봉하는 ‘1987’로 한 해를 닫는다. 내년엔 김태리가 품은 더 큰 스토리가 대중의 이목을 자극할 예정이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선 도시의 삶에 지쳐 고향으로 내려온 여주인공 혜원을 맡아 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6월 말에는 김은숙 작가의 신작인 tvN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으로 시청자들과 만난다. 조선말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서 이병헌과 로맨스 호흡을 맞춘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좋아해요. ‘아가씨’의 히데코도 굉장히 끌리는 캐릭터였어요. 다행히 주체적인 인물들 많이 맡게 된 거는 감독님들이 저로부터 뽑아내고 싶은 면들이 닮아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사진= 지선미(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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