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 울림 가득한 가족영화로 전 세계 영화팬을 울렸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신작 ‘세 번째 살인’으로 돌아왔다. 지난 14일 개봉한 후, 다양성영화로서는 고무적인 2만 관객을 돌파, 연말 박스오피스를 달리고 있다.

 

사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입에 올릴 때, 으레 따스하고 포근한 관계를 조명하는 드라마 장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고’ 이후 당분간 가족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많은 팬들의 아쉬움을 샀다. 그리고 꼬박 1년 만에 서스펜스 넘치는 법정물 ‘세 번째 살인’으로 돌아왔다. 우려와 다르게 처음으로 뒤집어 쓴 스릴러의 외피가 자못 멋스럽다.

‘세 번째 살인’은 젊은 시절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30년 간 복역한 미스미(야쿠쇼 코지)가 또 다시 살인을 저질러 사형 선고가 확실시 되는 가운데, 승리 밖에 모르는 냉철한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가 그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형량을 사형이 아니라 무기징역으로 낮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피살자의 딸인 사키에(히로세 스즈)가 미스미와 친밀하게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사건의 진실은 미궁에 빠진다. 그리고 갑자기 미스미는 진술을 번복하고 “난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외형적으로 가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답지 않은 작품이다. 영화의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는 살인, 재판과 시종일관 이어지는 모호한 서사는 꽤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이어온 고레에다 감독에게서 찾아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 외형 속에 감춰진 미묘한 질감은 정확히 그의 특질이 묻어난다. 사람-사람 간 관계에 대한 짙은 탐구를 시도해왔던 그가 이번 영화에서 그 해답을 찾은 듯도 보인다.

고레에다 감독이 전하는 말은 언어학의 기본 전제인 ‘의미는 관계에서 나온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듯 보인다. 극 초반부를 떠올려 보면, 시게모리는 과거 미스미의 행적을 조사하던 중 아주 오래 전 미스미의 첫 번째 살인을 수사한 형사를 만나게 된다. 거기서 늙은 형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텅 빈 그릇 같았다.” 극 중 밝혀진 미스미의 삶은 진정 텅 빈 그릇과 같았다. 그릇 속에 담겨 있던 가족은 하나둘 사라져 버리고, 공허한 그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꾸준히 십자가를 그었다.

 

사실 서스펜스 법정물이라는 장르 탓에 어쩔 수 없이 관객들은 진실을 탐구한다. 그리고 텅 비어버린 미스미의 진실을 채우기 위해 스크린 속 그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영화 속 시게모리와 사키에도 진실을 찾기 위해 각자 자신의 시선과 관계로 미스미를 재단한다. 그러는 사이 진실은 관객들 개개인 마다 다른 형태로 가슴에 자리한다. 진실을 찾으려는 관객의 본능을 활용, 미스미에 몰입하게 만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리한 화술이다.

이제 법정 안에서 오가는 공방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돼 버린다. 다만 관객-미스미, 시게모리-미스미 간 끈끈한 관계가 진실한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이 대목에서 시게모리는 관객의 시선을 대리하고 있는데, 그도 그 나름의 진실을 품고 미스미를 동정한다. 갑자기 “난 죽이지 않았어요”라고 번복하는 그의 말을 오롯이 믿지 않고, 선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비어버린 미스미의 그릇에 선함을 채우려 한 것이다. 이는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스미는 그가 부여한 의미를 거부한다. 사실 그 거부조차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명백히 영화 속에 비친 그는 착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을 뒤로 하고 극장 밖으로 나선 관객들은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미스미에 대해 각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을 거야’ ‘아냐, 정말 사이코패스였을 거야’ 등등... 결국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를 통해 ‘관계’를 탐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빈 그릇과 같은 미스미를 만들어 관객들이 어떤 의미로 그를 채우는 지 바라보면서 말이다. 물론 그 의미에 정답은 없다. 하늘가에 어지럽게 흩어진 전깃줄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사진='세 번째 살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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