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웠어요. 화가 나기도 했고. 1987년 6월항쟁은 학술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연구할 가치가 있고, 언급해야 할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인데 왜 영화로는 없을까 의아했어요.”

 

 

‘1987’은 안타까움과 의구심, 분노로 출발한 프로젝트였다. 결국 개봉 첫날 33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 청신호를 켰다. 2003년 ‘지구를 지켜라’로 창의적인 데뷔를 한 이후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에 이어 묵직한 시대물을 들고 돌아온 장준환(48) 감독을 만났다.

‘1987’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됐던 6월항쟁이 일어나기까지 6개월의 여정을 그린다. 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시작해 이한열 열사 사망으로 끝나는 과정이 한 편의 드라마로, 다큐멘터리로 관객의 가슴에 꽂힌다. 영화에는 실존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며 실제 사건들이 속도감 넘치게 질주한다. 사실의 재현과 극적인 연출의 균형을 잡기가 깨나 힘들었을 법하다.

“고민되는 지점이었어요. 실명까지 거론하기로 결정했는데 최소한의 팩트들 예를 들어 박 열사께서 남영동에서 돌아가신 건 사실이고, 고문에 가담했던 자들이 있었고,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커다란 비극이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 이제라도 용기를 내서 진실을 밝혀주십사 하는 의미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던 듯해요.”

최근에야 밝혀졌지만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가 횡행하던 시절이라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과연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사회적으로든 영화적으로든 충분히 가치가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라 여겼지만 만들어지지 않으면 모두에게 실망스러울 거란 강박이 저를 괴롭혔죠. 하지만 그런 생각에 빠지다보면 우울해지니까 잘 만들어보자, 좋은 이야기로 만들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아닌가, 스스로를 다잡았죠.”

영화 ‘카멜리아’(2010)에서 함께 작업하며 친분을 쌓았던 배우 강동원에게 이런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더니 눈빛을 반짝였다. 그 때부터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대통령 탄핵과 장미대선이 결정되기도 전인 시기였다.

“그에게 고문치사사건 은폐를 지시하는 대공수사처 박처장 역을 맡길 수도 없고, 워낙 주인공들이 많아서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 밖에 없는데 한번 볼래’ 했음에도 의외로 하겠다고 응답이 왔어요. 그때 많은 힘을 얻었죠. ‘동원이가 한다니까 형으로서 나도 참여해야지’라며 (하)정우씨도 참여해주는 등 용기를 내준 배우들이 있어서 큰 힘이 됐어요.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역할의 크기와 상관없이 참여해줬죠.”

촬영 직전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일어났으며 촬영 도중 정권이 교체됐다. 만감이 교차했다.

“30년 만에 왜 이 같은 일이 또 일어나야 하고, 국민들이 추운 겨울에 촛불 들고 나와 외쳐야 하는지 안타깝고 화가 났어요. 한편으론 광장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데 똑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신기하고 묘했죠. 그때와 지금의 광장은 어떻게 이어져 있으며, 다른 건 뭘까 성찰해보게 됐고요.”

 

 

그는 말한다. 좋은 이야기가 뭔지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을 끄는 이야기를 하는 게 원칙이라고. 그런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됐어요.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줘야 하는지 더욱 폭넓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되새김질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으면 바랐는데 다행히 그런 부분을 읽어주시는 것 같아 고맙고 위로받고 그래요.”

영화에는 애국을 부르짖는 박처장과 대공형사 조반장(박희순)을 비롯해 부검을 밀어붙이는 최검사(하정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윤기자(이희준), 재야인사 김정남(설경구)과 이부영(김의성), 서민을 대변하는 교도관 한병용(유해진)과 대학신입생 연희(김태리) 등이 대거 등장한다. 구심점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멀티캐스팅이다.

“워낙 많은 인물들이 나오기에 익숙하고 내공 있는 배우들이 짧은 순간에 많은 것들을 보여줘야 관객들이 이야기를 잘 따라갈 수 있겠더라고요. 무엇보다 모두가 주인공인 영화, 결국 광장에 나온 국민들이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 캐스팅을 필요로 했죠. 고전적 작법에선 감정이입할 주인공을 내세우면서 그 이야기를 따라가게 하고 카타르시스와 감동을 전달하는 구조인데 ‘1987’은 모든 사람들이 선명하게 각자의 캐릭터로 잘 조각이 돼서 그 합이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라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1987’을 촬영하면서 아내인 배우 문소리의 도움도 톡톡히 받았다. 후반부 연세대 시위 장면 촬영 당시 현장에 나와 학창시절 경험을 반추해가며 디테일한 부분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문소리가 감독으로도 데뷔했기에 얼떨결에(?) 부부 감독이 돼버렸다.

 

 

“감독이란 직업이 정말 힘들어서 자기 생명을 깎아먹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치열하게 해도 될까말까라서요. 물론 배우 감정을 쓰면서 하는 직업이라 힘들지만...이렇게 힘든 일을 한 집안에 2명이나 해도 괜찮을까 걱정이 들죠.(웃음) 본인이 즐길 수 있을 만큼, 마음 맞는 사람들과 잘 작업해 나간다면 문소리 감독의 다른 영화를 보고 싶기도 해요.”

평소 의뢰가 들어온 시나리오에 대해 평가를 해주고, 작업과정에서나 편집본이 나오면 의견을 묻기도 하는 등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귀띔한다.

너무나 큰 부담이자 책임감으로 가득했던 프로젝트를 완수하느라 차기작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또 그의 마음에 어떤 이야기가 들어올지 궁금해 한다. 그 사이 변화한 한 가지가 있다. 완벽주의 성향을 버려가고 있다는 거다.

“신영복 선생의 글 중에 ‘한 획이 잘 못 되더라도 다른 획이 와서 보완해주고 또 다른 새로움을 창조해 줄 수 있다’는 게 있어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하려 한다고 해서 결함이 없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에 도달했죠. 아등바등해봤자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고, 느긋한 마음으로 만드는 과정을 밟아나가는 게 더 중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과거엔 머릿속에 잘 설계해놓은 걸 구현하려 애썼는데 이번 작품에선 즉흥적으로, 현장 상황에 맞춰 배우들과 교감을 많이 하면서 일했어요. 여러모로 도전을 많이 한 작품이네요.”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삼청동 카페 안을 가득 채웠던 사람 좋은 이의 소박한 수다가 마무리됐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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