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석 자만으로도 영화팬들에게 신뢰를 주는 배우가 있다. 이병헌(48)이 그렇다.

이병헌은 오는 17일 개봉하는 ‘그것만이 내 세상’(감독 최성현)에서 그는 한물간 전직 복서면서 생전 모르고 살았던 동생 진태(박정민)와 정을 나누는 형 김조하 역을 맡았다. 최근 ‘내부자들’ ‘남한산성’ 등에서 보여줬던 카리스마를 벗고 친근함을 입었다. 유쾌함부터 쓸쓸함까지 진폭 넓은 감정을 넘나드는 그의 면모는 “역시 이병헌”이라는 찬사를 이끈다.
 

새해가 밝은지 얼마 되지 않은 날,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병헌을 마주했다. 이전에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아우라가 가득한 명품 배우의 모습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엔 편한 동네 형 같은 인상이었다. 그만큼 이번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가 좋았다는 증거일 테다.

“아무래도 ‘남한산성’ 때 보여드렸던 모습과는 극과 극이죠.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이에요. 괜히 무겁고 진지하기보단 조하라는 캐릭터가 가진 소소한 감정이 바탕이에요. 그러다보니 편했죠. 극단적 상황에 처한 인물을 연기하려면 상상에 많이 의지하잖아요. 하지만 이번엔 보다 더 제 생활에 가까워서 즐겁게 촬영했던 것 같아요.”

요즘 팬들에게 이병헌이란 브랜드는 ‘진지함’ ‘카리스마’로 점철되지만, 과거 드라마를 주무대로 활약하던 때에 그는 코믹함을 간직한 청춘배우였다. 1999년 SBS 드라마 ‘해피투게더’ 이후 오랜만에 과거의 면모를 뽐낸 이병헌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어린 팬들에게 이 모습이 어색할 거예요. 하지만 과거 TV드라마 때 좋아해주셨던 팬들에겐 추억처럼 전해질 것 같아요. ‘해피투게더’ 때 연기했던 서태풍 역과 전반적으로 비슷해요. 캐릭터도 그렇고, 드라마의 정서도요. 그때는 B급 야구선수였고, 지금은 망나니 복서라는 점만 조금 다르네요.(웃음) 20년이 거의 다 돼서 다시 동네형 이미지를 해보니까 참 좋았아요.”

  

물론 오랜 시간 카리스마 배우로 쌓아온 이미지를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그는 굳이 다시 변신하지 않아도 누구나 인정하는 연기파 배우이지만,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꼭 참여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밝혔다. 연기 변신은 뒷전이었다.

“처음 책(시나리오)을 읽고서 딱 한 가지 생각뿐이었어요. 너무 재밌다.(웃음) 보통 감동코드가 들어가면 과잉되는 지점이 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가장 좋았던 건 조하의 정서예요. 보통은 마지막 쯤 주인공들의 쓸쓸함이 해소가 되잖아요. 그런데 조하는 제 한몸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 끝까지, 엔딩크레딧 이후에도 쓸쓸함에 몰아넣어요. 마치 ‘선인장’ 같았어요. 가족애라는 게 그를 버티게 한다지만, 참으로 멋진 자기희생을 하는 인물인 것 같아요.”

그간 숱한 작품을 찍어온 ‘베테랑 배우’ 이병헌이지만, ‘그것만이 내 세상’은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울컥하는 장면이 많았다고 술회했다. 이어 관객들도 영화의 정서에 푹 빠지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영화에서 조하의 감정을 어떻게 보여드려야 하나라는 점이 가장 고민됐어요. 극 초반에는 굉장히 드라이하죠. 나를 버리고 떠난 엄마를 만나는 모습이나, 생전 모르던 동생을 만났을 때 특히 건조해요. 그러다가 아픈 엄마가 끝까지 아픈 동생만 챙기니까 처음으로 징징거리는 부분에서 감정을 드러내요. 참 울컥했죠. 조하가 유일하게 속마음을 터놓는 부분이라 더 그랬나 봐요.”
 

이처럼 쓸쓸함과 눈물이 넘치는 영화지만, 막상 촬영 현장은 웃음바다였다. 이병헌은 특히 형제애가 중심이 되는 영화답게, 극 중 형제로 등장하는 박정민과 많은 정을 나눴다고 전했다. 그는 앞서 ‘남한산성’ 개봉 당시 싱글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도 “박정민이라는 배우가 나를 긴장하게 한다”고 극찬한 바 있다.

“시나리오의 유머 정서가 현장에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다들 많이 웃으면서 촬영했죠. (박)정민이도 저도 별별 아이디어를 쏟아내면서 촬영했다. 스태프들은 저희가 대본에 나오지 않는 대사를 하니까 하도 웃어서 NG를 내곤 했어요.(웃음) 가장 기억나는 건 제가 주먹으로 진태를 치는 신이었는데요. 정민이가 쓰러지더니 갑자기 ‘뽕~’하고 방귀를 뀌더라고요.(웃음) 온몸으로 연기를 하는 친구예요. 하하. 이게 실제로 쓰이진 않아서 아쉬워요.”

 

이병헌은 연기 잘하는 사람이 많기로 유명한 충무로에서도 ‘연기 신(神)’으로 손꼽힌다. 영화 메가폰을 들었던 최성현 감독도 그를 두고 “연기의 신”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막상 이 평가는 듣는 이에겐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에게 ‘연기 신’ 평가에 대한 속내를 물었다.

“감독님이 표현이 과격한 분이에요.(웃음) 그런데 사실 이 수식 자체는 너무 감사한 일이죠. 제가 올인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잘한다고 말씀해주시는 건 신나는 일이에요. 하지만 연기라는 게 등수매김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모든 배우들이 다 연기 신이죠. 요즘엔 ‘넌 연기 신이 아니라 연기 사람이야’ 하면 오히려 더 기분 나빠할 걸요?(웃음) 저도 제 나름의 기준이 있듯이, 다들 자기만의 프라이드 안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거예요.”

  

지난 몇 년간 쉼 없이 열일해온 이병헌이기에 많은 팬들은 그의 2018년도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새해에도 1월부터 열일을 예고, 상반기가 채 지나기도 전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TV컴백 소식도 알렸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새해 첫 영화이기도 하고, 또 추운 날에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드라마예요. 돌아보면 지금 우리 시대는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한 가족이 모였을 때도 각자 스마트폰을 켜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지 쉽게 대화를 나누려고 하지 않는 게 현실이잖아요. 이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메세지를 주는 것 같아요. 쉽게 접할 수 있는 뻔한 일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진=BH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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