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는 돈 없으면 죄인이다.” 윤석열 예비후보 부인 김건희 씨가 했다는 말이다. 만약 이 말이 세태를 개탄하는 의미로 쓰였다면 한 나라 영부인 후보쯤 되는 사람이 가져 마땅한 현실 인식이다. 그러나 말을 전한 사람의 증언은 그렇지가 않다. “1억원짜리 수표를 내놓으면서 어머니 재판의 유리한 증언을 부탁했는데 거절했더니 일어서면서 던진 말...”이라는 것이다.

‘돈 없으면 죄인’이라는 말의 함의는 복잡하다.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돈은 무조건 벌어야 한다’는 천민자본주의 현실이 투영된 말이기도 하고 ‘가난이 죄려니’하는 패자의 자학적 체념이 반영된 말이기도 하다. 특히 후자는 왕조시대의 반상(班常)처럼 빈부(貧富)가 신분인 시대에 풍진세상을 살아내자면 가져야 하는 전수(傳受)된 지혜일 것이다.

미국을 기회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최상위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공정(公正)이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10여년 전 ‘정의’를 말하던 마이클 샌델이 공정을 들고나온 것이다.

샌델은 불공정의 뿌리를 능력주의로 보았다. 누적된 결과를 가지고 하는 경쟁을 불공정의 제도화로 보는 것이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생의 3분의 2 이상이 소득 상위 20% 가정의 자녀들이며 프린스턴과 예일 대학은 소득 하위 60% 출신 학생보다 상위 1% 출신 학생이 더 많다. 샌델은 경쟁에서 이긴 상위계급이 자녀들에게 부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명문대학 출신이라는 명품 보증서까지 붙여주는 기계적인 능력주의가 불공정을 낳는다고 말한다.

광화문 집회에서 성조기가 나부끼는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공안 검사가 시국사건 학생을 기소할 때 “피고는 시골의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나...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체제 탓으로 여기고”로 시작하는 기소장을 쓰던 시절은 옛날 이야기다.

이른바 SKY라고 불리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입학생의 55%가 소득 분위 맨 꼭대기인 9~10분위 가구에 속해있다. 명문대학 출신은 그 자체가 신분이다. 취업, 승진, 결혼 등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이 출신고, 출신대학인데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부만 물려주고 명문대 출신이라는 로얄 카드는 물려주고 싶지 않겠는가?

이들이 교육정책을 흔든다. 막강한 힘으로 언론 등 오피니언 리더를 동원해 마음에 안 드는 정책은 흔들어 결국은 부모의 투자에 비례해 성적이 나오는 구조를 만든다. 이 등쌀에 치여 미래의 베토벤, 미래의 아인슈타인이 몇 명이나 사장됐을지 누가 아는가?

문제는 성공한 금수저 출신 엘리트들의 차별 의식이다. 지난 6월 중앙일보 조사에 의하면 학력, 소득이 높을수록 공정에 관심 없는 것으로 나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이 자리에 왔다. 능력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잣대가 아닌가?” 그러나 그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다른 사람이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 자신은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걸었다는 걸 모른다.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타인의 슬픔을 보면 같이 슬픔을 느끼는 연민이나 동정심이 있다. 설사 냉혹한 범죄자라도...”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도덕감정론> 첫 장에 나오는 글이다. 두 책이 저자가 다르다면 각자의 생각일 수 있지만 동일인이라면 두 책의 명제를 연결해서 봐야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장의 자유에 맡기면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할지라도 이웃의 슬픔에 공감하는 도덕이 전제되지 않으면 공동선에 이를 수 없다”는 저자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 잠들다>라고 미리 써 놓은 묘비명이 이를 증명한다.

각인의 이기적 욕망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빈부 격차는 신도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경쟁에서 뒤진 사람을 품지는 못할망정 ‘돈 없으면 죄인’이 되는 사회라면 건강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더구나 그런 천박한 현실 인식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 곁에 있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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