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촬영 현장 여자 스태프들을 성추행한 사실이 알려진 조재현이 채 한나절이 지나지 않아 사과문을 발표했다.

 

‘미투(#me too)’ 운동으로 성추행에 휩싸인 배우들 중 가장 발 빠른 대처를 했다.

이때부터 시작됐다. 조재현의 사과문이 교본이라도 된 듯, 성추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배우들이 앞다투어 단어부터 맥락까지 유사한 사과문을 ‘배포’ 했다.

‘선 사과 후 폭로’ 사태를 맞이했던 최일화도, 끝없는 성추행 폭로로 연일 포털 검색어에 이름을 올린 조민기도 사과문을 통해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뜻을 밝혔다.

보도자료 형식으로 언론사에 전달된 사과문들은 빠르게 소비됐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의 사과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치 찍어낸 것처럼 뉘앙스마저 비슷한 사과문은 여론의 공분을 샀다.
 

◆ 피해자는 사라진 사과문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할 주체인 피해자들은 사과문에서 지워져 버렸다.

소속사 뒤로 숨어버린 가해 당사자들은 대중을 향해 “머리 숙여 사과”하고 “모든 걸 내려놓겠다”며 달아오른 여론을 진화하기에만 급급한 모습이다.

조민기는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제 잘못입니다”라면서도 “피해자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는 것으로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마무리 지었다.

배우들의 사과문 어디에도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저 상황이 커지니 미안하다는 말로 마무리 지으려는 조악한 모양새다.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낸 피해자들에 비해 가해자들의 사과는 너무 쉽게 쓰여진 건 아닐까.

 

◆ 자수 대신 자숙, 가해자들이 선택한 너무 쉬운 반성

 

우리나라의 성폭력 사건의 공소시효는 통상 10년. 피해자의 진술과 목격자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재판까지 가는 길도 험난하다.

이번 ‘미투’ 운동에서 거론된 가해자 대부분이 법적인 처벌을 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 가해자들은 자숙의 형태로 ‘스스로 벌주기’에 나섰다. 자의가 아니라도 당분간 이들이 TV, 영화, 연극 어떤 형태로든 대중 앞에 서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연예인들이 말하는 자숙의 형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여론이 진화될 때까지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사건이 희미해질 때쯤 대중의 곁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자숙이 아니라 자수가 필요할 때다. “모든 책임을 통감한다”면 천편일률적인 말들로 써 내려간 사과문 뒤에 숨지 마시길.

 

◆ 존경받던 예술가의 민낯에서 드러난 ‘더러운 욕망’
 

이번 사태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은 건 비단 연예인들의 이름이 오르내려서가 아니다.

많은 후학을 양성하며 예술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이들이 권력을 이용해 성추행과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점이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다.

폐쇄적인 예술계에서 ‘미투’ 운동에 이름을 올린 오태석, 배병우, 조민기, 한명구는 모두 대학 강단에 섰던 교수들이었다.

당사자들 교수로 재직하던 대학들은 정작 ‘미투’ 운동 이후 입을 닫아버린 모양새다. 학교 차원의 전수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은 채 피해자들은 경질이나 해임이 아닌 ‘사퇴’를 하고 강단을 떠나갔다.

부패한 권위주의 관행을 제대로 청산하지도 못한 채 대학가는 새 학기를 앞두고 있다. 학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워 이대로 묻어버린다면 이윤택 전 예술감독의 표현대로 곳곳에 숨은 ‘더러운 욕망’들은 언제고 다시 고개를 들지 모른다.

 

사진=프리픽, 비디오머그, 윌엔터테인먼트, DSB엔터테인먼트, 싱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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