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왜놈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옳다.” “의(義)를 보았거든 할 것이요, 성패를 계교 하는 것은 이름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다.”

1896년 3월 9일,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 조시케를 맨손으로 처단한 백범 김구(1876~1949)는 결행 직전, 자문자답으로 자기를 다스렸다. 상대는 군도를 소지했고 부하까지 대동했으니 백범이지만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리라.

“이놈! 만국 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죽이라 하였더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으로, 죽어서는 귀신이 되어 맹세코 너의 임금을 죽이고 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겠다.”

해주 감영에서 일본 순사를 향한 백범의 포효다. 이처럼 그의 언행은 직심 그대로다. 옳으냐 그르냐가 판단기준이요, 행동의 준칙이었다. 따라서 백범은 나라 사람으로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 신명을 바치는 것은 마땅한 의리요, 천명이라 여기고 그 천명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다.

의는 인, 예, 지, 신과 함께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이요,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다. 따라서 잔뼈가 굵어갈 무렵부터 뇌리에 박힌 백범의 성리학적 신념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는 기꺼이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존재가치를 실현하는 길(道)이요, 국가 사회에 대한 의무(忠)다.

백범의 치하포 의거 12년 후 1908년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 의거가 일어났다. 대한제국 외교 고문인 스티븐슨의 피살사건이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클로니컬 신문과 인터뷰에서 “한국 백성이 어리석어서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아니면 아라사에 빼앗길 것”이라는 망언이 사건 발단이다.

이에 한국교민회, 특히 사탕수수 농장의 교민들이 1불, 2불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하고 워싱턴의 이승만에게 비행기 표를 보내면서 통역을 부탁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 변론을 통역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뿐만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도 “나라의 명예를 더럽힌 암살자”라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같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이처럼 사뭇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지도자에 대해 후세의 평가는 각기 입장에 따라 극과 극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높이는 사람들은 백범을 테러리스트로, 진정한 국부는 김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임시정부에서 탄핵(1925년 3월 11일)된 사례를 들어 이승만의 미국 활동을 명함을 위한 독립운동으로 혹평한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세 번째 물음에도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 라고 할 것이다.” - 김구, 광복 1주년 기념사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 이승만, 1945년 10월 16일 귀국성명, kbs 라디오.

백범은 혁명가, 우남은 정치가. 두 지도자에 대한 양시론적 평가다. 혁명가 김구는 목적에 역점을 뒀고 정치가 이승만은 방법을 강조했다. 이마누엘 칸트의 방법을 차용하면 ‘독립’은 정언명령이고 ‘단결’은 가언명령이다.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한 정직과 성공하기 위한 정직은 다르다. 성공하기 위해서 정직한 사람은 다른 방법이 보이면 정직을 버릴 수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살인범 변론을 통역할 수 없다”던 이승만은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를 끔찍이 보호했고 그의 통치하에서 조봉암의 사법살인이 자행됐다. 1921년에는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하고 해방 후에는 반탁통치 운동을 주도했다. 김구의 독립운동은 목적이었고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수단이었다. 그것이 같으면서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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